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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베르제스] ‘늑대’편에 서는 변호사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재판 변론인 선정 문제를 놓고 서구 언론들을 장식한 변호사가 있다. 자크 베르제스(79)가 그 주인공이다. 후세인의 체포 당시부터 언급되던 그의 이름은 3월 말, 사담 후세인의 조카가 후세인 담당 변호사로 지명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베르제스는 프랑스인 의사 아버지와 베트남인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1925년 타이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인과 결혼해 공직을 잃어야 했던 아버지의 경험을 고스란히 기억하며 자란 베르제스에게는 다양한 사회와 상황 속에서 야기된 인종차별에 민감했던 추억들이 있다.

젊은 시절, 레지스탕스를 거쳐 공산당원이 되었다가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알제리 독립군들 편에 서기도 한 베르제스는 그 기간에 프랑스가 보면 ‘역적’으로 간주할 만한 인물들의 변호를 도맡았다. 그래서 그에게 붙게 된 별명이 듣기에도 섬뜩한 ‘악마의 변호사’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는 재판에 많이 이겨서 명성을 쌓았다기보다는 그가 변호를 맡은 고객들의 높은 악명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고객에는 세기의 테러범, 나치 정권의 비밀경찰, 전범으로 인권재판소에 기소된 자 등 역사와 더불어 악명을 날린 범죄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미 판결도 나기 전에 유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변호가 불가능한 인물들인 셈이다. 그런 재판에 단골로 변호를 맡는 베르제스에게는 남다른 철학이 있다. “개와 늑대 가운데 나는 늘 늑대 편이다. 그 늑대가 상처를 입었다면 더욱더 그렇다”라고 저서에 쓰기도 했다.

그는 후세인 재판과 관련해 “대량학살무기는 걸프전 이전에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 팔았고, 학살로 말할 것 같으면, 걸프전 이후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 가한 식량봉쇄와 폭격이 낳은 희생자들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베르제스는 아직 체포된 후세인을 만나지도 못했으며, 앞으로도 접견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운 상태다. 적십자사를 통해 후세인 접견을 신청해놓긴 했지만,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재판이 이뤄지기 전에 후세인이 사망하는 경우다. 후세인이 입을 열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많은 세계의 전현직 정치인들 때문에 재판이 제대로 열리겠느냐는 전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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