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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 “이래서 남편은 목숨을 걸었구나”

등록 2004-04-09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아특수강 해고노동자 조성옥씨 부인 코넬리아… 남편의 굴뚝 농성 통해 한국 노동운동의 고난 깨닫다

군산=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목숨 걸고 하는 일임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기아특수강 해고노동자 조성옥(42)씨의 부인 로드 다그마 코넬리아(40·군산대 독문과 객원교수)씨는 지난 겨울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난다. 남편 조씨가 지난해 11월6일 회사쪽의 부당해고에 항의해 농성을 시작했는데, 1∼2주 정도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농성이 무려 132일간의 ‘사투’가 돼버린 것이다. 남편은 50m 높이의 공장 굴뚝에 올라가 영하 20도의 혹한과 굶주림,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독일에선 파업만으로 충분한 일을…”

조씨는 지난 1994년 회사 사규를 어겼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전북 군산시 소룡동의 기아특수강 군산공장에 입사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임금교섭 중에 회사가 노조 대의원들을 상대로 회사의 임금안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았는데, 이것이 불법임을 확인한 조씨가 노조원들에게 이를 고발하는 유인물을 돌렸다. 그러나 회사는 “조씨가 회사의 허락을 받지 않은 불법 유인물을 돌렸다”며 오히려 조씨를 해고했다. 조씨는 공장 굴뚝에 올라가 복직을 요구하는 농성을 했고, 회사는 “무조건 복직시키겠다”는 각서를 쓰고 조씨의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조씨가 굴뚝에서 내려온 뒤 회사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회사쪽은 조씨에게 써준 각서가 “조씨의 협박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억지를 부렸다. 조씨는 지방과 중앙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요청했으나 기각당했고, 민사소송까지 냈지만 구제받지 못했다. 조씨는 회사를 상대로 10년에 가까운 기나긴 복직투쟁을 벌이다 지난 겨울 또 다른 동료 해고노동자와 함께 굴뚝 농성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코넬리아씨는 남편이 농성을 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제 고향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노동운동은 파업이 전부예요. 파업만으로도 충분히 노동자의 권익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한국처럼 단식농성이라든가 분신이라는 게 전혀 없어요.” 농성은 독일어로 번역조차 안 되는 낯선 말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뜻이 너무나 확고해 말릴 수가 없었다. “남편이 노동운동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결혼 전에 이미 알았어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한 거고. 난 농성이라는 게 파업 때 피케팅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죠.”

하지만 남편의 농성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더욱 기막힌 것은 회사쪽의 태도였다. “처음에는 물 이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식사만이라도 반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회사와 싸웠습니다.” 코넬리아씨를 비롯한 농성자 가족들은 매일 휴대전화로 안부를 확인했다. 그러나 지난 12월 중순 군산지역 시민단체와 민주노총 등으로 꾸려진 대책위원회가 공장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여는 등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회사쪽의 태도가 달라졌다. 조씨가 대책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휴대전화 건전지 반입을 막아야 한다며 음식물까지 못 올라가게 했다. 회사쪽은 가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곧 음식물 반입을 허용했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음식물 안에 휴대전화 건전지가 들어 있는지 확인한다며 긴 젓가락으로 밥과 국, 반찬 속까지 다 뒤졌어요. 그렇게 헤집은 음식을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지난 1월 설날 연휴 무렵 수은주가 영하 20도까지 떨어졌을 때 코넬리아씨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남편이 추위를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됐어요. 굴뚝 위에 공간이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눕기에는 너무 좁아서 서로의 체온을 이용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군산에는 폭설까지 내렸는데, 남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만 나더라고요.” 조씨 등은 굴뚝에 올라가면서 침낭 등을 미리 준비했지만 군산 앞바다의 거센 바람과 살인적인 추위를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살짜리 딸은 물론 태어난 지 9개월 된 아들도 매일 밤 아빠를 찾으며 보챘다.

회사쪽, 반찬 속까지 다 헤집다

하지만 회사쪽은 조씨와 성의 있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회사쪽은 조씨 등이 무조건 굴뚝에서 내려올 것만을 요구했다. 대책위의 문정현 신부가 중재에 나섰지만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 급기야 남편은 지난 2월23일 단식에 돌입했다. 코넬리아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설마했는데, 남편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남편의 단식이 계속되자 회사쪽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농성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여론을 의식한 회사가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결국 지난 3월16일 회사는 대책위에 조씨의 ‘조건부 복직’을 약속했다. 조씨를 2007년 7월 다시 ‘채용’하되 18개월 동안 휴직 기간을 둔 뒤, 이 기간 동안 회사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 2009년부터 완전히 복직시키겠다는 조건이었다. “2009년이면 남편은 이미 40대 후반으로 구조조정 대상이 될 텐데, 이걸 복직이라고 할 수 있나요? 더구나 남편과 함께 농성에 참가한 동료는 복직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씨 등은 대책위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장기간 농성으로 몸이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남편은 지난 10년 동안 공장 앞에서 복직 시위를 해왔는데, 회사는 아예 대화를 거부하는 거예요. 용역깡패를 시켜서 시위대에 폭행을 가하고…. 남편이 법원에 소송을 냈는데 재판이 너무 오래 걸려 참 황당했죠. 독일은 노동법원이 따로 있어서 노동사건은 생계와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속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일어난 일 모두가 독일에서는 참 보기 힘든 일입니다.” “지난해 크리마스 연휴 때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에 가기로 했는데, 남편이 농성하는 바람에 같이 못 갔습니다. 그때 친정아버지가 ‘조 서방은 왜 안 왔냐’고 물으셨는데,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더군요.”

어느 노동운동가와의 첫 만남

코넬리아씨가 조씨를 만난 것은 지난 1999년이었다. 코넬리아씨는 1997년 군산대학에 객원교수로 임용돼 2년째 강의를 하고 있었고, 조씨는 친척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학교 강의를 끝내고 책을 사러 자주 그 서점에 갔었는데, 남편은 나한테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줬어요. 그때 남편은 노동자가 제대로 대접받는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어요. 삶에 대한 태도가 진지한 게 아주 맘에 들었죠.”

조씨는 지난 2000년 코넬리아씨에게 프러포즈를 할 무렵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결혼은 포기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 험난한 길을 이해해줄 수 있는 배우자가 별로 없기 때문에. “결혼 전에는 그 말뜻을 잘 몰랐어요. 내 경험으로는 노동운동이 그렇게 험한 일도 아니고 누구나 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했죠.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 남편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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