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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 의료제도’는 죽으라는 선고

등록 2008-06-06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민영화 수순 밟아가는 일본, 75살 이상을 건강보험 체계에서 강제 분리시킨 제도에 격한 반대 목소리</font>

▣ 도쿄(일본)=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eyh@hanmail.net

<font color="#C12D84">[표지이야기 3부-밀려오는 민영화] </font>

출발은 언제나 ‘개혁’이다. ‘효율’은 가능한 한 높여야 하고, ‘비용’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 사이에서 쉽게 잊혀지는 게 ‘사람’이다. 지난 4월 일본에서 시행에 들어간 ‘후기 고령자 의료제도’는 민영화를 축으로 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정부가 추진해온 ‘개혁’의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준다.

논의 초점은 ‘건강권’ 아닌 예산과 효율성

일본에서 70살 이상 노인에게 무상의료 서비스가 처음 도입된 건 1969년이다. 당시 도쿄도가 첫발을 뗀 이후 불과 4년 만인 1973년 노인 무상의료제도는 ‘복지국가’ 일본의 상징이었다. ‘평화헌법 9조’와 함께 ‘노인 무상의료제도’를 자부심의 상징으로 귀히 여겨온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일찌감치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탓에 제도 도입과 함께 문제점이 하나둘 노출되기 시작했다. 우선 고령자들이 대거 병원으로 몰리면서 진료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같은 증세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이른바 ‘사다리식 진료받기’도 급증했다. 또 영리를 추구하는 일선 병원에선 ‘난진난료’(亂診亂療)가 횡행했다. 정부의 예산을 최대한 뜯어내기 위해 각종 검사와 과도한 진료행위가 판을 쳤다. 제도 개선 움직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 제도가 전국화한 지 4년여 만인 1977년 “노인을 ‘국민개보험제도’(국민 모두가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제도)에서 분리시키는 별도 제도를 마련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일본의 사회마저 ‘일본 의료의 공적 책임과 사회성’을 강조하며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다케미 다로 당시 의사회장은 후생노동성의 이런 제안을 “노인을 소외시키려는 ‘고려장’ 구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1983년 ‘노인보건제도’라는 절충적 형태의 제도가 태어났다. 하지만 자금 부족 사태는 이어졌고, 고이즈미 전 총리 정부는 2001년 집권과 함께 ‘민영화 드라이브’를 걸어 노인보건제도에 ‘개혁의 칼’을 들이댔다.

별도의 심의위원회까지 꾸려 진행한 논의의 초점은 노령층의 ‘건강권’이 아니라, ‘예산’과 ‘자금 운용’의 효율성에 맞춰졌다. 당시 심의위원회에 참여한 한 의료전문가가 “심의위원회에 노인병 전문가는 적고, 노인의 건강이 논의된 적도 거의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게 75살 이상을 기존 의료제도 바깥으로 강제 분리시킨 ‘후기 고령자 의료제도’다.

올해 4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이 제도는 1300만여 명에 이르는 75살 이상 노인을 ‘후기 고령자’라고 이름 붙여, 기존에 가입해 있던 국민건강보험이나 조합건강보험에서 강제 탈퇴시켜 새로운 그룹으로 묶었다. 이제껏 자녀의 부양가족으로 건강보험에 가입해 자기부담금이 없던 저소득층 노인을 포함해 모든 고령자에게 빠짐없이 보험료를 챙기기 위해서다.

이름뿐인 ‘개혁’의 상처뿐인 패배

“인생 끝났다고 선고라도 받은 느낌이다.” “늙고 병들면 그냥 죽으라는 말이냐.” 제도 시행을 앞두고 격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고령자들의 국회 앞 시위도 잇따랐다. ‘원칙적인 운용과 개선’을 말하던 후쿠다 야스오 총리 정부는 뒤늦게 ‘장수의료제도’ 도입 등을 입에 올렸지만, 민주당 등 야권이 제도 자체를 폐지하라고 촉구하면서 정치 쟁점으로 변해갔다. ‘후기 고령자 의료제도’의 문제점을 알리는 운동에 총력을 쏟아온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의 스즈키 아쓰시(61) 회장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상자기사 참조).

“2차 대전 패전 뒤 만들어진 일본 헌법 제25조는 국민생존권을 규정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게 국민개보험제도다. 이에 따라 일본은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세계보건기구(WHO)의 국민건강달성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고, 세계 최장수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 정부는 국가 재정 악화를 막는다는 미명으로 의료보험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다. 건강보험에서 개인 부담인 창구 납부 부분을 늘렸고, 지금은 아예 의료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보험증을 몰수하고 있다. 지난 2006년에만 정부의 요양병동 삭감 정책에 따라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 23만 명이 병원 밖으로 내쫓겼다. ‘후기 고령자 의료제도’는 국가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야겠으니, 병원 신세를 많이 지는 나이 든 사람들은 스스로 의료비를 부담하라고 제도화한 게다.”

제도 도입 한 달이 채 안 된 지난 4월27일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중의원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지난해 9월 집권한 후쿠다 총리 정부엔 일종의 중간선거였다.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으로 보수 정서가 강한 야마구치현은 자민당의 전통적 표밭이었다. 그래서 선거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보수연정 파트너인 공명당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야마모토 시게타로(59) 자민당 후보가 민주당의 히라오카 히데오(54) 후보에게 2만1944표 차로 참패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마치무라 노부타카 관방장관은 선거 다음날 “새 고령자 의료보험이 고령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제도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점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름뿐인 ‘개혁’의 상처뿐인 패배였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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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216B9C">
민의련 스즈키 아쓰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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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darkblue" size="4">“가장 절실한 이에게 가장 높은 부담”</font>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민의련)은 일본의 대표적 보건의료단체로 불린다. 지난 1953년 창립 이래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강조해온 민의련에는 현재 6만2천여 명의 의료인과 318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정부 시절부터 ‘후기 고령자 의료제도’ 반대운동을 펼쳐온 이 단체 스즈키 아쓰시 회장은 “의료보장은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font color="#216B9C">일본 의료보험제도에 대해 소개해달라.</font>
=크게 세 가지다. 대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조합건강보험, 중소기업 노동자가 대부분인 정관보험, 그리고 자영업자와 농민·연금생활자가 주축인 국민건강보험이 있다. 국민 누구나 세 가지 중 하나에 가입돼 있다. 이를 ‘국민개보험’이라 부른다. 언제 어디서나 안심하고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민개보험 제도는 평화헌법 9조와 함께 일본 시민사회의 자랑이다.
<font color="#216B9C">후기 고령자 의료제도를 도입한 이유가 궁금하다.</font>
=정부는 국민개보험제도를 지탱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75살 이상이 되면 입원 비율이 높고, 1인당 의료비도 증가한다. 따라서 이들의 의료비를 억제하는 한편 자기부담금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이다. 우정사업까지 민영화한 고이즈미 정권은 일본 사회의 자랑이던 공적 의료제도를 축소하는 한편, 노령자들에겐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며 민간 보험회사를 선택하라고 권장했다. 또 의료기관의 주식회사화를 인정해 ‘의료는 비영리법인이 하는 것’이라는 상식을 파괴했다. 장기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민영화하기 위한 사전 포석인 게다.
<font color="#216B9C">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뭔가?</font>
=정부의 설명과 달리 75살 이상 고령자의 자기부담률 10%가 고정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후생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2년에 한 차례씩 14%, 18%로 자기부담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국민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단카이 세대’로 불리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후기 고령자’가 되는 2025년에는 현 보험료의 4배 이상을 내야 한다. 전체 의료비의 40%가량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의료 지원이 가장 절실한 연령층에게 가장 높은 부담을 지우는 게 말이 되나?
<font color="#216B9C">반대 여론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font>
=최근 〈NHK〉의 여론조사 결과 ‘후기 고령자 의료제도’를 폐지 또는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87%에 이르렀다. 시민사회도 한목소리로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75살 이상은 죽으라는 얘기냐?”고 반발하는 의원들이 있을 정도다. 야당은 6월 국회에서 후쿠다 총리 문책안을 상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의료의 공적 부분을 잘라내고 민간 부분만 부풀려나가는 건 돈 많은 사람만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러고도 국가경쟁력 강화를 말하니, 국민 저항만 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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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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