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예산 삭감 문건에 호남 민심 분노… “동서화합 구호는 말뿐이었더냐”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한나라당이 호남 민심을 놓고 때아닌 속앓이를 하고 있다. 발단은 호남지역 사업 예산 삭감 방침이 포함된 한나라당의 내부 문건이 12월3일 의 보도로 공개되면서다.
한나라당 예산결산특위 명의로 작성된 ‘2005년 예산안 검토’라는 제목의 이 문건(163쪽 분량)은 “지역편중이 우려된다”며 호남 지역의 굵직굵직한 현안 사업 예산을 전액 또는 대폭 삭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광주 문화중심도시 건설에는 “현 정부의 대표적인 선심성 사업”이라는 이유를, 전남 고흥의 청소년 스페이스 캠프 건설에는 “BC 비율(비용 대비 이익)이 낮고 정치적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유를 달았다. 광양항 건설, 무안국제공항, 여수공항 확장, 광주 민주인권평화사업 예산 등도 비슷한 이유로 삭감 대상에 포함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호남지역 사업에 대해 ‘경제성 원칙’을 따져 손본 흔적이 역력했다. 다른 지역의 단위 사업 중에는 이와 같은 이유로 삭감 대상에 포함된 것은 없었다.
지도부는 참고 자료일 뿐이라 해명했으나
이 소식이 알려지자 호남에서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두 얼굴의 한나라당”이라는 성토가 잇따르고 있다. 전남지역 공무원직장협의회연대의 성명을 시작으로 광양시·강진군 등 지자체와 의회에서도 잇따라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광주 상공회의소는 “몇 개월간 호남 방문 때마다 강조했던 동서화합과 지역균형발전의 노력은 무엇이냐”면서 “한나라당은 영남 지역당이 아닌 전국당으로 거듭나라”고 촉구했다. 경제성 원칙만 따진다면 모든 게 수도권으로 집중될 뿐, 낙후된 지역을 위한 정책적 고려와 예산 책정은 영영 할 수 없게 된다는 논리였다.
민심이 격앙되자 안희석 한나라당 전남도당 위원장과 이환의 당 국책자문위원장이 8일 오전 급하게 박근혜 대표를 찾아, 비공개 면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박 대표는 “광주·전남 예산이 원안대로 통과될 수 있도록 신경쓰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한구 정책위의장도 “실무선에서 참고 자료로 만든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해명과 달리 한나라당 의원들은 문건 내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1월23일 농림해양수산위 예결소위에서는 전남 광양항 컨테이너 부두공단 정부 출연금 300억원 중 200억원과, 전북 새만금 물막이 보강 공사비 500억원을 삭감할 것을 주장했다. 11월22일 국회 문화관광위에서는 문건에 나와 있는 표현을 써가며 광주 문화중심도시 예산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졌다.
이런 사실이 속속들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은 “(예산안 처리) 결과를 보고 말하자”면서 한발 물러섰다. 이한구 의장도 8일 면담에서 “100% 원안대로 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럴 경우 한나라당이 내년도 예산 삭감폭으로 내세웠던 7조5천억원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산안 처리되면 기자회견 열 것”
더 큰 문제는 이번 일로 각별히 공들여왔던 ‘호남 끌어안기’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박근혜 대표는 취임 전후로 줄곧 호남에 구애를 보내왔다.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에 이어, 7월에는 대표 경선 첫 합동 유세를 광주에서 했다. 8월 들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유신 시절의 피해에 대해 사과했고, 첫 의원연찬회를 2박3일간 전남 구례에서 열었다. 일부 영남권 의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소속 의원들과 함께 5·18 묘역 참배도 했다. 차기 집권을 위한 이른바 ‘서진’ 정책의 일환이나, 동서화합을 명분으로 내건 이런 행보는 당 안팎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의화 한나라당 지역화합특위 위원장은 10일 “예산안이 처리되면 광주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해를 풀 것”이라고 말했다. 당의 핵심 관계자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호남지역 국회의원이 한명도 없다 보니 (상임위별로 지역구 방어가 없어) 빚어진 면도 있다”면서 “그동안의 노력이 외면받아 억울하고, (호남 민심 잡기가) 진땀 날 정도로 어렵다는 걸 거듭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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