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전문] “고의성 없다… 승객 구조는 해경 몫”

참사 56일 만에 6월10일 열린 세월호 첫 재판 지상 중계 전문…

혐의 전면 부인에 방청석에선 “아무리 국선이라지만 너무한 것 아니냐”
등록 2014-06-17 18:59 수정 2020-05-03 04:27
3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사고 원인과 구조 활동의 문제점을 밝혀낼 첫 재판이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 심의로 6월10일 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3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사고 원인과 구조 활동의 문제점을 밝혀낼 첫 재판이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 심의로 6월10일 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4월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해 3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사고 원인과 구조 활동의 문제점을 밝혀낼 재판이 6월10일 시작되었다. 매주 화요일에는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 등 선원 15명이, 매주 금요일에는 청해진해운 김한식 대표 등 선사 임직원 5명이 법의 심판대에 선다. 이후 기소된 한국해양안전설비 사장과 우련통운 직원의 재판도 각각 열린다. 해경의 초기 구조 활동도 검찰이 수사 중이다. 은 세월호 참사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낼 관련 재판을 지상 중계한다. _편집자


6월10일 오후 2시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의 심리로 제1회 공판준비기일이 열렸다. 승객 400여명을 내버려둔 채 세월호를 탈출했던 선장 이준석(69)씨 등 선원 15명이 처음 법정에 섰다. 사망 292명, 실종 12명의 희생을 불러온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56일만이었다(당일 기준). 살인, 살인미수, 수난구호법위반죄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씨와 1등 항해사 강원식(43), 2등 항해사 김영호(47), 기관장 박기호(54)씨 등은 “(살인의) 고의성이 없었다” “승객구조는 해경의 몫이다”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다른 피고인 11명도 “선장, 1등 항해사의 지시 없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공황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배에서 빠져나왔다”며 범죄사실을 대부분 부인했다. 재판을 지켜보던 단원고 2학년 여학생(17·사망) 어머니는 “뻔뻔한 낯짝에 물병을 던지려다 참고” 법정을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목 놓아 울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100여명은 오전 9시30분 경기도 안산에서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오후 1시40분께 광주지법에 도착했다. 진도팽목항에서 개인 차량을 타고 실종자 가족 4명도 합류했다. 가족들은 ‘네놈들이 사람이냐, 짐승만도 못한 XX’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법원 입구에 들어섰다. 법원 관계자가 검색대에서 “재판정에 가져갈 수 없다”고 막아서자 몸싸움이 벌어졌다. 몇 분간 실랑이가 이어지다가 “다 늦는다”며 다른 가족들이 설득하자 물러섰다. 유족 7명은 ‘300명의 고귀한 생명 짓밟은 선원, 내 세금으로 밥 먹여주는 것도 아깝다’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법원 입구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201호 대법정 방청석(103석)과 재판을 생중계하는 204호 보조법정 방청석(74석)이 가득 찼다. 오후 2시2분, 재판장 임정엽 부장판사와 장재용·권노을 판사가 대법정에 들어왔다. 재판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재판장: “비극적인 사고가 왜 발생했는지, 피고인들의 책임이 있다면 어느 정도 형벌이 받아야하는지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다. 재판부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혀나가겠다. 피해자 가족들 심정은 이해하지만 분노를 표출하면 재판 진행이 안 된다. 재판 시간이 앞으로 6개월밖에 없다. 수십 명의 증인이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재판이 계속 중단돼 6개월이 넘어가면 (1심 구속기간이 끝나) 피고인들을 다 풀어줘야 한다.”

 가족들은 “피고인들이 거짓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마냥 듣고 있기만 하겠느냐”며 반박했고 재판장은 “법정질서를 유지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법정이 정리되자 2시23분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 등 피고인 15명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 수의를 입은 이씨의 좌현 가슴에는 ‘4011’라는 수형번호가 박혀 있었다. “이 살인자야, 밥은 잘 먹고 있냐. 우리 자식은 죽었다.” “당신 자식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뻔뻔한 얼굴 똑바로 보여라” “어떤 XX가 웃어?” 피고인들이 법정에 들어오는 순간 방청석에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재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세월호 피해자 가족대책위 위원장인 김병권(47)씨가 증인석에 앉았다. 그는 희생된 단원고 2학년 김아무개양의 아버지다.

 유족 대표: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시간은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도 차가운 바다에서 우리들의 손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이 시간이 얼마 길까 생각하면 잠을 청할 수 없다. 요즘도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엄마, 아빠 나왔어’하고 말하며 가방을 내려놓을 것만 같다.” 말을 하다가 김씨는 흐느꼈다. 그 순간 방청석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유독 피고인들만 살아 있다. 누구보다 당시 상황을 잘 알았던, 승객을 반드시 구호해야 했던 피고인들이 가장 먼저 뛰쳐나왔다고 해경은 피고인들을 가장 먼저 구출했다. 백번 양보해도 (피고인들이) 도망가기 전에 ‘대피해라. 빨리 나가라’는 안내 방송은 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우리 아이들은 살 수 있었다. 피고인들은 승객들이 죽든 말든 상관 없다,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살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살인인가. 피고인들은 승객만 죽인 게 아니다. 우리 가족들의 영혼까지 죽였다. 고통스럽지만 살아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아이들이 왜 갑자기 죽어야 했는지, 바다 속에서 고통받았을 아이들에게 적어도 누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줘야 한다. 아이들 앞에서 약속해야 한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재판은 그 첫 단계다. 다시는 4월16일이 없는 사회로 만들어달라.”

세월호 선박직 승무원(15명)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10일 오후 선원들을 비롯해 이준석 선장이 광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으로 가기 위해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세월호 선박직 승무원(15명)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10일 오후 선원들을 비롯해 이준석 선장이 광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으로 가기 위해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씨는 피고인들을 향해 덧붙였다. “당신들의 자식이 죽었다 생각하고 진실을 말해 달라. 꼭 부탁한다.” 희생자 가족의 흐느낌이 법정을 가득 채웠다. 진도 팽목항에서 온 실종자 가족이 나왔다. “첫날 진도에 내려와 아직까지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바지선에서 작업하다가 첫 재판이 있다고 해서 실종자 가족 4명과 왔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 진행형이다.”

 2시43분 이준석씨부터 피고인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확인하는 인정심문이 시작됐다. 재판장은 직업은 세월호 참사 당시 직책을 얘기하라고 했다. 피고인들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담담히 답했다. 3등 항해사 박아무개(26)씨만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재억 부장검사가 피고인 15명에 대한 기소 요지를 낭독했다.

 검사: “검찰은 선원 15명을 포함해, 청해진해운 임직원 4명, 세월호 부실관리자 2명 등 37명을 입건했다. 더 나아가 해경이 승객을 구조할 때 문제점을 계속 조사 중이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도입할 당시 무리한 수리와 증축으로 복원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배의 좌편이 우편보다 더 무거워 과거에도 갑판의 화물이 한쪽으로 쏠려 제주항 출항이 지연되기도 했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선원들의 운항상 잘못이다. 피고인 이준석은 맹골수도를 직접 조타하지 않았다. 3등 항해사 박아무개는 레이더만 보고 조타수에게 지침을 지시했다. 조타수는 큰 각도로 변침함으로써 좌현으로 기울어 전복하게 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법률상 승객 보호 임무를 지키지 않았다. 비상시 각자 임무가 있었으나 수행하지 않았다. 선내 머물라고 지시만 하다가 가장 먼저 빠져나갔다. 빠져나가고도 수 백 명의 승객이 선내에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특히 선장인 이준석은 세월호 총책임자로서 조타실에서 안내방송 등 구조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당시 1등 항해사 강원식과 김영호는 여객부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와 통신하면서 세월호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기관장인 박기호는 사고가 나자 엔진을 정지하고 기관 직원을 탈출시켰다. 심지어 머리를 다친 조리부 승무원을 버려둔 채 퇴선했다. (피고인들은) 인명구조의 의무가 있었고 승객들이 사망할 것이라고 인식했음에도 그들을 버렸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가 가능하다.

 피고인들의 범죄 행위로 가장 많이 단원고의 어린 학생들이 희생됐다. 수학여행에 한껏 들떠있던 학생들은 피고인들의 잘못으로 영문도 모른 채 생사의 갈림길로 갔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그저 착하게도 선내에 대기하다가 ‘엄마, 사랑해요’ 문자만 남기고 세월호 함께 바닷속에 갇혔다. 아직 피해자가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의 애끓는 마음을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피고인들 재판에서 침몰 원인 규명과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

 떨리는 목소리로 박 검사가 낭독을 끝냈을 때 다른 검사 3명의 눈가도 붉어져 있었다. 방청석은 다시 울먹였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20분간 휴정했다. 답답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법정을 나온 가족들은 두통약을 찾았다. 법정 밖에 대기하던 법원 관계자들과 119구조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3시40분부터 피고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피고인 15명 가운데 14명의 변호를 국선 변호인이 맡고 있다. 1등 기관사 손아무개(57)씨만 사선 변호사가 담당한다. 선장 이준석씨의 변호인이 포문을 열었다.

 선장 이준석씨의 변호인: 마치 가슴 한가운데 돌덩이라도 놓인 것 같은 무거운 심정으로 법정에 섰다. 형사 재판에서 변호인은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변호인의) 말과 행동이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각자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하는 것으로 너그럽게 이해해달라.

 이준석은 정년 퇴직 후 계약직 직원으로 정식 선장인 신아무개를 대신한 임의 선장이다. 과적과 고박 불량은 1등 항해사와 선사(청해진 해운) 본사 관계자에 의해 통제됐다. 계약직 불과한 피고인이 이의 제기하지 못했다. 복원성 약화도 일본에서 (세월호를) 도입해 개조한 시점부터 발생한 문제다. 모든 관계자 인지했다. 사고 지점은 3등 항해사가 문제없이 운항해왔고 조준기는 15년 이상 조타 경력자가 맡았다. 물살 빠른 (맹골수도) 지역이라도 문제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관심 기울일 상황이 아니었다.

 세월호는 무리한 선박 개조와 증축으로 무게 중심이 위로 이동했고 복원성에 심각하게 떨어졌다. 기준을 초과해 화물을 적재했고 고박은 불량했으며 평형수는 부족했다. 피고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원인이 돼 침몰했다. 일부 과실이 있지만 (피고인의) 과실과 침몰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세월호는 수평을 맞추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갑자기 기울었다. 피고인은 선실에 나뒹굴어 꼬리뼈를 다쳤다. 바로 조타실로 이동해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와 상황을 파악했다. 수평 잡기 위해 노력하고 VTS 교신을 유지했다. 구명장비 착용과 퇴선 방송을 순차 지시했다. 할 수 있는 구호 조치를 하도록 말이다. 그렇게 구호 조치를 이행하던 중 세월호 옆으로 다가온 해경에게 조타실에서 마지막으로 구조됐다. 그 후 배가 급격히 기울었고 이동이 불가능했다. 구명정과 헬기 등 구명 장비를 갖추고 초기부터 사건을 관리한 해경에 의해 승객 구조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선원법 위반인지 의문이다.

부작위 살인 및 살인미수가 성립하려면 살인행위, 실현가능성, 고의성이 모두 인정돼야 한다. 꼬리뼈를 다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구호 조치를 다했고 조타실에서 2등 항해사 등과 마지막에 나온 피고인이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승객이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구호하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탈출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당시 상황과 상식에 비춰 이해하기 힘들다. 살인 및 살인미수죄 적용을 법리적으로 세심하게 살펴달라,

 모든 승객이 구조될 때까지 배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데 중도에 해경 구조된 점은 비난 면치 못한다. 피고인도 죄책감으로 교도소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고 있다.

세월호 참사 관련 이준석 선장 등 15명에 대한 첫 재판이 10일 오후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가운데 재판을 참관한 유가족들이 구치감 앞에서 선원들의 사과와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세월호 참사 관련 이준석 선장 등 15명에 대한 첫 재판이 10일 오후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가운데 재판을 참관한 유가족들이 구치감 앞에서 선원들의 사과와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때 방청석에서 “적당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재판장이 그 피해자 가족을 증인석에 앉혔다. “이미 언론에 다 나왔다. 아무리 국선(변호인)이라지만 너무하는 것 아니냐. 적당히 해달라. 앉아있는 게 불편하다.” 재판장이 설명했다. “언론에 나왔다고 재판부가 다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피고인을 위한 변호인의 주장에 화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방청석에서 소리치면 재판부가 증거 수집을 못 한다. 피고인이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더라도 (재판은) 진행해야 한다. 재판부가 (나중에) 판단한다. 끝까지 들어달라.” 변호인의 변론이 이어졌다. “피고인도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사고 직후 가능한 구호 조치했고 배가 심각하게 기울어 추가 구호 조치를 못한 채 해경에 의해 구조됐다. 잘못 이상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선장 이씨에 대한 변론이 끝낸 뒤 변호인은 3등 항해사 박씨를 변론했다. 박씨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3등항해사 박아무개씨의 변호인: “2013년 12월7일 세월호에 승선한 이후 정식 선장 신아무개에게 도수 지시법으로 변침하라고 수차례 지침을 하달받았다. 피고인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사고 지점에서 조타수에게 5도 이내 변침을 지시했다. 사고 해역은 물살 빠르고 당시 반대편에서는 배 한 척이 올라오고 있었다. 피고인은 배와 충돌하지 않도록 레이더를 지켜보고 무전 등 종합 상황을 살펴야 했다. 조타수가 지시한 변침 각도를 넘어서 조타하는지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니다. 조타수는 15년 경력자다. 이전에도 사고 지점을 수차례 운항했고, 문제가 없었다. 이준석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해경에 의해 구조된 것뿐이지 도주한 것도 아니다.

 사고 직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서 조타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만 있었다. 해경 구조된 기억도 피고인에겐 없다. 피고인의 잘못이 전혀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당직 근무자가 결과적으로 사망한 승객보다 먼저 퇴선한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피고인도 교도소에서 매일 밤 눈물로 지낸다. 엄청난 참사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검찰의 공소 제기에 잘못된 부분 없는지 살펴달라.”

 2등 항해사 김영호씨의 변호인: “김명호 피고인은 당직 근무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가 자다가 8시50분께 (배가) 좌현으로 30도 이상 급격 기울어 잠이 깼다. 옷을 겹쳐 입고 조타실로 갔다. 3등항해사 박씨가 “힐링 탱크 가동해보라” “중심 잡아보라”라고 얘기했다. 1등항해사는 8시55분에 제주 VTS와 교신할 때 퇴선할지 모르니 구명조끼 입고 승객들 대기시키라고 교신했다. 그 교신 듣고 양대홍(45·사망) 사무장에게 구명조끼 입고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진도 VTS로 해경에 조난 신고하고 속히 구조해달라고 요구했다. 승객을 바로 퇴선시켜 바다로 뛰어들게 할 수 있었는데 주변에 배도 없었다. 맹골수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조류가 세고 수심이 40미터 된다. 실종 위험이 있어 퇴선 지시 못했다. 9시 25분 진도 VTS에서 경비정 10분 내 온다는 이야기 듣고 안내방송 전달했다. 8시35분~40분에 근처 해경을 확인하고 양 사무장에게 무전기로 퇴선하라고 지시했다. 조타실에서 구조됐는데 구명정을 타서 선원이라고 밝혔다. 그후 승객들도 구조하고 의식을 잃은 승객에게 심폐소생술도 했다.

 조난 신고, 구조 요청, 퇴선 지시했기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살인 미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피고인은 선장 지시 없이 행동할 수 없는 2등항해사다. 해경도 사고 당시 경사가 너무 심해 세월호 진입이 어려웠는데 피고인이 개별 구호 행위가 가능했는지 의문이다. 피고인이 퇴선하자마자 해경의 구조활동이 시작됐는데 구명정(구명뗏목)을 투하했다면 승객이 얼마나 살 수 있었을지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 김명호씨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에 힘을 주고 입을 꽉 다물었다.

 재판장은 “피고인들이 주장하는 사실 관계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해경이 출동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해경을 증인으로 불러 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눈을 감은 채로 재판을 받던 1등 항해사(견습) 신아무개(33)의 변호가 이어졌다.

 1등항해사 신아무개씨의 변호인: “2014년 3월까지 제주월드 2등항해사로 일하다가 좌현 무릎인대를 다쳐 병가를 내고 쉬었다. 세월호에서 승선을 제안받아 4월15일 처음 견습 항해사로 배를 탔다. 근로 계약이나 근무 조건도 합의하지 않은 견습에 불과했다. 2등 항해사 김영호와 16일 새벽 3시30분까지 당직하고 잠을 잤다. 8시50분께 배가 30도 이상 기울어 잠을 자던 복장 그대로 조타실로 갔다. (1등항해사) 강원식이 VTS 교신을 시작했는데 (세월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 확인해주고 구조 요청했다. 제주운항관리실 통신기로 구조해달라고 9시10분께 교신했다. 그밖에 더 많은 구조 활동 의무가 있지만 첫 승선이라서 구조 장비 등을 사실상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항해사나 선장의 지시에 따라 교신 구조활동 했다.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다른 승무원에게 건네주며 걱정했다. 해경이 9시 45분께 나오라는 얘기해 구명정으로 옮겨탔다. 선원이라는 신분을 밝히고 승객 구조 활동했다. 비상 상황에서 해경이 도착하면 함께 구조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검찰이 유기치사 혐의를 적용했는데 유기의 고의성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만일 유기했더라도 어차피 많은 희생자가 날 수밖에 없는, 유기와 무관하게 벌어진 상황이다.”

 1등항해사 강원식씨의 변호인: “선원으로 더 많은 승객을 구조하지 못한 점을 자책한다. 거짓말이나 얕은 술수로 책임 회피할 생각은 없다. 배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각자 무슨 행동했는지 사실대로 알려지길 원한다. 정당한 절차와 판단을 통해 죄가 있다고 하면 겸허히 수용할 각오가 돼 있다.

 화물 과적과 고박은 형식상 피고인이 맡은 업무가 사실이다. 하지만 선사(청해진해운)는 직접 화주와 화물계약을 맺었다. 화물종류와 물량은 적하운임목록에 작성되는데 우련통운이 맡았다. 고박작업은 전문 면허업체인 원광공사가 했다. 청해진해운 물류팀 차장이 직접 통제했다. 선사가 손익분기점이 넘도록 화물을 적재했다. (청해준)해운에서 급여받는 직원에 불과한 피고인이 과적을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화물량을 줄여달라고 건의했지만 선사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재화중량 초과하지 않도록 평형수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고박은 전문업체 맡았고 이를 지휘 감독할 권한이 강원식 피고인에게 없었다.

 강원식 피고인은 4월16일 3시30분부터 7시30분까지 당직하고 박씨와 교대했다. 조타실 뒤 침실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깨어났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어 있는 걸 알았고 조타실로 들어갔다. 선장, 2등항해사 김영호, 박씨, 조타수가 있었다. 빨리 구조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배가) 좌현으로 심하게 기울어 앞쪽에 놓인 무선 통신기 앞으로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배가 기운 방향을 이용해 통신기 앞으로 갔고 8시55분께 채널 12번을 눌러 제주 VTS에 첫 구조 교신을 했다. 사고 해역 관할인 진도가 아니라 제주로 교신한 이유는 침실에서 잠을 자다가 나와서 사고 위치를 몰랐다. 목적지인 제주 인근 해상으로 생각했다. 외부에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니다. 이후 다른 선원이 진도 VTS와 교신했다. 위급 상황에서도 휴대전화를 가지러 침실에 다녀온 이유는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청해진)해운에 연락하도록 돼 있다. 9시14분께 청해진해운 해무팀과 3분14초 동안 통화했다.

 좌현 구명벌을 터뜨리기 위해 좌현 출입문으로 이동했다. 구명벌로 가려면 윙브리지를 타고 가야 했는데 당시 50도 이상 기울었다. 급경사 탓에 그대로 내려가면 난간에 부딪혀 바다 빠질 것으로 보였다. 호스를 이용해 구명벌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잠시 후 조타수 박아무개가 좌현 구명벌을 터트리려고 구명복을 입고 호스로 연결해 윙브리지로 내려갔다. 그는 윙브리지 난간 붙잡고 있었다. 반쯤 열린 좌현 출입문에 기대 박씨를 바라봤다. 갑자기 출입문 뜯겼고 그대로 윙브리지로 내려가게 됐다. 출입문이 밀고 당기는 미닫이 방식인데 몸무게로 뜯겨나간 것이다. 해경이 조타실 쪽으로 왔다. 3층 좌현 갑판에서 기관부 선원을 태우고 윙브리지에 매달린 박씨를 본 것이다. 해경이 조타실에 선원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본다.

 선장의 경력에 강원식 피고인은 비할 바 못된다. (청해진해운에) 입사한 계기도 이준석 선장의 제안이었다. 선장이 제선한 상황에서 강원식 피고인이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해경 구명정에 남아 구조 활동을 일부 도왔다. 배 구조를 잘 알기에 해경 요청에 협조했다. 운항관리규정상 구호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지만 배가 좌현으로 심하게 기울어 우현으로 이동이 불가능했다. 현장을 지휘하고 구명장비를 투하하고 승객을 유도해 안전한 퇴선 조치 취할 수 없었다, 선원들이 해경에 구조된 상황이라 이후 해경 구조 활동이 원활히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승객이 선내 갇혀 사망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의사 가 없었다.”

 재판장은 두 번째 휴정을 명했다. 재판은 오후 5시1분에 재개됐다.

 조기장 전아무개(61)의 변호인: “4월15일 오전 11시께 구두 협의해 승선했다. 세월호 구조 활동 등 알지 못했다. 이날 7시 30분까지 당직 근무하고 침실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좌현으로 기울자 침대 모서리 허리를 부딪쳤다. 복도에서 다른 기관부 선원과 구명동의 입고 기다리다 함께 나갔다. 해경에 의해 세월호에서 빠져나갔다. 배가 기울자 공포심에 이성적 판단 불가능했다. 승선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배치표상 임무를 알지 못했다. 조타실, 객실 정보도 얻지 못했다. 기관장 지시 없이는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조기수 김아무개(61)의 변호인: “오전 3시30분까지 당직하고 쉬고 있었다. 배가 좌현으로 급격히 기울어 침대에서 굴렀다. 냉장고에 얼굴 부딪혔고 벽에 몸 부딪혔다. 앞니 부러지는 등 상해를 입었다. 어깨, 무릎에도 통증 느꼈다. 구명동의 입고 기관부 선원과 복도에 있다가 갑판 나가자고 누군가가 제안해 손잡고 갑판으로 갔다. 어깨 통증으로 손을 잡지 못하고 혼자 복도에서 기다렸다. 다른 선원 나간 후 해경에 의해 밖으로 나갔다. 상해와 정신적 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배 기운 원인과 승객 상황 정보 얻지 못했다. 비상 상황에 대한 지휘가 없어 구조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조타수 조아무개(56)의 피고인: “피고인은 공소 사실처럼 우현 대각도로 타를 돌린 사실이 없다. 세월호는 이미 135도로 유지한 채 항해했다. 3등항해사가 140도로 우현 변침을 지시했다. 피고인이 140도로 변침했는데 배가 143도까지 진행됐다. 이에 좌현으로 3도가량 타를 돌렸다. 그런데도 우현으로 더 진행됐다. 이를 막고자 피고인은 좌현으로 5도가량 타 돌렸다. 그런데도 세월호는 우현으로 더 진행하게 됐다. 피고인은 우현으로 급변침 막고자 좌현으로 15도까지 돌린 사실만 있다. 타를 잘못 돌린 사실 없어 업무상 과실이 없다.

 조타수는 선장, 항해사의 지시가 있어야 구호 조치 가능하다. 선장, 항해사의 지시가 없었기에 구조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해경이 구명조끼 주며 뛰어내리라고 해서 (배에서) 이탈한 것이다. 해경 지시에 따른 퇴선을 도주 의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조타수 박아무개(59)의 변호인: 박경남 피고인은 조타수로 선장, 항해사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 사건 당시 선장, 항해사가 구조 조치를 지시한 사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타실에 오자마자 피고인은 힐링 작업 했다. 진도 VTS에도 연락하고 승객 구조가 가능한지도 문의했다. 구명정 터트리려고 노력도 했다. 구조 후 해경 선박에서 (조타수) 오아무개와 (파이프로) 객실 창문 깨고 구조 활동도 했다. 승객을 유기할 의사가 있었다거나 유기했다고 볼 수 없다.”

 조타수 오아무개(57)의 변호인: 역시 구조 조치 등을 위해서는 선장, 항해사의 지시가 있었어 했지만 지시가 없었다. 그럼에도, 우현 구명정 터트리려 나가려는 노력 했고 조타수 박씨도 도왔다.

 기관장 박기호(54)의 변호인: “피고인이 먼저 엔진 정지하고 기관실에서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3층 복도에서 기관부 선들과에서 만난 것이 탈출할 의도는 아니었다. 선장 이준석 지시로 피고인은 기관실로 내려가려 했다. 조타실의 조명이 꺼져서 우선 비상발전기실을 확인하려 했다. 비상발전기실은 3층에 있었다. 비상발전기를 보호하려 했지만 더 이상 진입이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3층에 모여 있던 기관부 선원들과 합류했다. 황망한 상태에서. 검찰 공소 사실을 보면, 피고인이 조타실 5층에서 3층으로, 기관부 선원들이 1층에서 3층으로 이동한 것으로 선내 이동이 가능했다고 판단했는데 이동 과정에서 박기호 피고인은 부상을 입었다. 기관부 선원들도 많은 어려움을 거쳐서 도달했다. 3층에 모여 있을 때 좌우현 이동뿐 아니라 수평 이동도 어려웠다. 중앙문이 폐쇄돼 우현으로 올라가 식당 쪽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이러한 이동이 불가능했다. 피고인은 당시 승객 상황도 인지하지 못했다.

 피고인이 부상당한 조리부 직원의 구조 조치도 안 했다고 검찰은 공소사실에서 밝혔는데,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몸을 주물러 주도록 지시했다. 뇌진탕으로 어렵다는 직원 얘기를 듣고 옮겨 조치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피고인은 공포에 휩싸여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선내 물이 차서 더이상 대기할 수 없어서 갑판으로 나갔는데 마침 해경 구조정으로 보고 승선했다. 엉겹결에 타서 선원이라고 밝혔고 아직 탑승하지 못한 선원들이 부상당한 직원들을 데리고 함께 탑승할 것으로 생각했다.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와 관련해 기관부에서 (승객) 퇴선 명령을 독자적으로 하기에는, 충분히 숙지를 못해 판단할 수 없었다. 조타실에서 퇴선 명령을 했는지 등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갑판으로 나간 것은 사실이나 이를 퇴선이라 보기 어렵다. 기관부 선원만 빠져나갈 것이란 생각 안 했다. 승객들도 해경 등에 의해 충분히 구조될 것이라 생각했다. 승객이나 부상자가 사고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망 결과를 암묵적으로 용인한 사실이 없다. 또 유기 치사죄와 관련해서도 피고인은 승객과 떨어져 있었고 위험에 처한 상태였다. 대피 명령을 내릴 책임 있는 지휘, 능력이 있었는지 살펴야 한다. 황망한 상황에서 구조 조치를 못 했다는 이유만으로 유기라 할 수 없다. 해경의 지시로 퇴선했는데, 이를 자발적 유기의 고의성으로 추정하기 어렵다.”

 재판장은 나머지 피고인(4명)의 변론을 6월17일 제2회 공판준비기일 때 듣자고 했다. 방청석에선 “그냥 하자”고 했다. 김병권 가족대책위원장은 “안산에서 4~5시간 걸려 왔다. (오늘 피고인들에게) 들은 내용은 자기 직업과 도피성 얘기밖에 없다. 다음에 또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재판장은 “증거 목록 등 다음 재판에 나 얘기를 해야 재판이 진행된다. 재판은 앞으로 몇 십번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목록은 1번부터 1929번까지 이어졌다. 수사기록은 1만장을 넘어 책으로 50권이나 됐다. 변호인들은 증거 목록과 증거를 다음 공판준비기일 때까지 검토해 증거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재판장은 “(세월호와 구조가 비슷한) 오하마나호를 현장 검증하러 가보겠다. 재판부가 전부 돌아다니며 봐야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선원 재판은 매주 화요일에 열린다. (1심 구속 만기까지) 날짜가 모자라면 하루 더 쓸 계획이다. 2차 기소된 청해진해운 직원 재판은 6월20일부터 매주 금요일에 심리한다. 3차 기소된 해양안전설비 사장과 4차 기소된 우련통운 직원의 재판일도 잡아야 한다. 재판장은 “갈길이 멀다”고 했다. 재판부는 방청객에 앞서 가장 먼저 퇴정하는 관례를 깨고 이날 제일 늦게 법정을 나왔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는 의미에서였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희생자 가족은 광주지법을 떠나지 못했다. 광주지검 구치감 앞에서 피고인들이 타고 갈 호송버스를 가로막았다. “(피고인들이) 잘못한 게 없으면 떳떳하면 유족들 앞으로 나와라”고 요구했다. 경찰들이 가로막고 서자 “도대체 누구를 보호하는 것이냐”고 소리쳤다. 가족들은 ‘아이들의 영혼이 보고 있다’ ‘판사님의 현명한 재판을 믿는다’ 등을 적은 손팻말을 들고 법원에 앉아 시위했다. 피해자 쪽 변호사들이 중재해 “내 새끼 살려내라” 등 구호를 외치며 1시간30분 만에 농성을 풀었다. 오후 7시40분 가족들이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안산을 향해 떠난 뒤 5분도 지나지 않아 호송버스 4대가 광주지법을 빠져나갔다. 제2회 공판준비기일은 6월1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린다.

광주=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