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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시 누구 아이디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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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1-07-13 15:48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21 윤운식

한겨레21 윤운식

Q. 몇 해 전부터 서울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시가 새겨지기 시작했는데요, 보기 좋습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송기영)

A. 백번 공감합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좋은 시를 읽고 가슴이 훈훈해진 기억이 있는 분들, 한두 명이 아닐 겁니다. 서울시가 벌인 어느 문화사업보다도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시민은 들러리로 세우고 연예인을 불러 외양만 치장한 관제 페스티벌이나 여느 문화 행사들보다 백배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요? 서울시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멋진 아이디어를 낸 분은 다름 아닌 서울시 엄연숙 전 문화예술과장님이었습니다. 짝짝짝짝! 지금은 업무를 잠시 쉬고 미국에서 연수를 받는다고 합니다. 엄 전 과장님에게 전자우편을 보냈습니다. 장문의 전자우편이 돌아왔습니다. 엄 전 과장님의 전자우편과 서울시의 설명을 종합한 사연은 이랬습니다. 2008년 봄 서울시는 ‘시가 흐르는 서울’이라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담당 공무원들은 시를 어떻게 서울에 ‘흘릴지’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엄 전 과장이 낸 아이디어가 스크린도어를 이용하는 거였습니다. 왜 하필 스크린도어였을까요? 사실 서울시는 이전에도 지하철역 벽에 좋은 시들을 새겨놓았습니다. 문제는 벽에 아무리 좋은 시를 새겨놓아도 당최 보는 이가 많지 않더라는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보통 벽을 등진 채 플랫폼을 향했으니까요. 마침 당시는 지하철이 스크린도어를 많이 설치하던 참이었습니다. 이때다 싶었겠죠. 처음에는 지하철공사 쪽에서 난색을 표했습니다. 쉽게 말해, 돈도 안 되고 덕도 안 되는데 반길 이유가 없었겠죠.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스크린도어에 시가 새겨졌습니다. ‘기대지 마세요’ 등 살벌한 경고문이나 광고가 있던 공간에 시가 하나둘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업 초기에는 이른바 유명 시인의 작품만 스크린도어에 떴답니다. 그러다 2009년 서울시 문화예술과의 유정태 주무관님이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유명 시인뿐 아니라 무명 시인들의 작품도 실어보자는 것이었죠. 그래서 시청에서 품을 좀 들였습니다. 국내의 등단한 모든 시인에게 자신의 대표작을 자천해달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시인들은 바로 호응했답니다. 아예 시집을 통째로 보내는 시인도 많았답니다. 지금도 서울시 문화예술과에는 시집이 많이 쌓여 있다는군요. 시민과 시인들의 호응이 뜨겁자 압력 아닌 압력도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시를 써달라는 시민들의 ‘스토킹’이 있었다는군요. 호응을 ‘견디다 못한’ 서울시는 지난 5월 한 달 동안 아예 공모를 했습니다. 한 사람당 한 편씩 시를 보내도록 했는데, 무려 1460여 편의 시가 답지했습니다. 지금은 8명의 시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서 응모작 가운데 옥석을 추려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체 지하철 289개 역 4548개 스크린도어 공간에 2천여 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시청은 이 사업에 약 1억5천만원의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시인들에게 지불하는 5만원 정도의 저작권료와 시를 새기는 데 예산을 씁니다. 어떤가요. 독자님들도 시상을 가다듬어 내년 시청 공모 행사에 응모하시면요. 집 앞 지하철역에 자작시가 오르는 멋진 경험도 가능하겠습니다. 속 들여다 보이지만, 소재를 ‘가리봉’이나 ‘구파발’처럼 동네 지명으로 잡으면 성공할 확률이 높겠지요.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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