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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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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30년 전 엄마와의 대화

등록 2008-08-21 00:00 수정 2020-05-03 04:25

▣ tnwls91


연분홍빛이 나는 파스텔톤의 노트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써온 일기장이다. 그리고 내 일기장 옆에 포개어져 있는, 지금 보기에 약간은 촌스러운 하늘색 노트는 엄마가 고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장이다. 맨 첫 장에는 ‘1977. 12. 27 생일’이라고 적혀 있다.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던 나는 엄마의 일기장을 늘 내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읽곤 했다. 그러다가 K군과의 연애담, 혹은 이모와 머리끄덩이를 잡으며 싸운 내용이 나오면 항상 엄마 앞으로 달려가서 그 부분을 소리 내어 낭독(?)하곤 했다. 하지 말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신이 나서 짓궂게 더욱 큰 소리로 읽었다.

얼마 전, 우연히 책상 정리를 하다가 오랜만에 펼쳐든 엄마의 일기는 내가 예전에 읽은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18살의 내가 보는 18살 엄마의 일기. 기분이 묘했다. 볼펜이 아닌 잉크를 묻힌 펜촉으로 적은 일기에는 몸무게 고민, 수업을 빼먹고 뒷동산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 일, 모내기를 하다가 거머리에게 물린 일, ‘주말의 명화’를 보며 느낀 점 등등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엄마가 수업 중에 선생님 몰래 쓴 부분이다.

이 일기장에는 엄마의 포근함이 있어서 좋다. 읽다 보면 30년 전 엄마와 재미난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난 이렇게 재미있게 읽는데, 정작 일기를 쓴 엄마는 창피하다며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신다.

세월의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낡은 노트지만 여고생 엄마의 감수성이 묻어 있는 이 일기장은 나에게 보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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