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의 오래된 물건] 테이프를 고치며

등록 2008-08-14 00:00 수정 2020-05-03 04:25

▣ 노상학 서울시 중랑구 신내1동


결혼 초기인 1980년대 중반에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녔다. 당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부동산과 전세 가격이 자고 나면 올라 월급쟁이 봉급으론 주인이 올려달라는 금액에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년 이삿짐을 싸면서 글쓴이는 아내의 곱지 않은 눈총을 받곤 했는데 그 이유는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한 ‘카세트테이프’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용돈을 아껴 모은 카세트테이프가 어느샌가 1천 개가 넘었다. 사실, 이 테이프 중 너무 오래 들어 카세트 헤드가 손상되고 보관 상태가 나빠 폐기해야 할 대상이 거의 절반에 가깝다. 아내는 이사할 때마다 쓸데없는 것은 좀 버리고 가자고 애원(?)을 했다.

70년대 말 음반시장은 이른바 ‘백판’이라고 불리는 복제, 복사판 천국이었다. 테이프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사본은 보통 600원이면 구입했다. 오리지널이라고 부르는 라이선스 테이프는 가격이 무척 비싸 개당 4천~5천원을 했다. 글쓴이는 영구 보관(?)을 위해 품질이 좋은 라이선스 테이프를 무리하게 구입하기도 했지만 알토란같이 히트곡만 수록된 복사본도 유혹에 못 이겨 사오곤 했다.

테이프를 사느라 용돈이 항상 궁해 친구 형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다. 몇 푼의 돈이 쥐어지면 또다시 단골 레코드점으로 달려가 온 정신을 팔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방 한구석으로 밀려난 테이프 진열대를 보면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시선이 가는 테이프 하나를 뽑아들면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오르고. 오늘도 늘어진 테이프을 정비하고 고장난 테이프 헤드를 교환하며 무더위도 잊은 채 나만의 열락의 세계에 빠져든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