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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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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시골 여선생의 텔레비전

등록 2008-08-01 00:00 수정 2020-05-03 04:25

▣ 길영순 충남 공주시 신관동


중학교 생활을 끝으로 고향 집에서의 마음 편한 생활에서 벗어나 객지에서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7년간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생활을 했다.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둔 해의 2월, 나는 사범대학을 갓 졸업하고 3월부터 어느 시골의 중학교로 발령받아 초년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객지 생활이 이어졌는데, 학교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생활이 이어졌다.

책을 읽고 수업 자료를 만들며 지내는 생활도 몇 년이 흐르니까 점점 나만의 여유 시간이 많아져갔는데, 특히 겨울이면 한참을 자고 나도 날이 샐 줄을 몰랐다. 이때에 결국 말 없는 대화 친구로 작은 텔레비전을 장만해 들여놓았다.

때로는 습관처럼 시간을 함께하면서 문득 ‘바보상자’와 친구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데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시골이라 어둑어둑한 밤에는 여자 혼자서 밤길을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았고, 컴퓨터나 인터넷, 휴대전화가 대중화되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외부와의 소통이 여의치도 않았다. 그때 텔레비전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혼자 살기를 몇 년 한 뒤 학교가 있는 곳이 고향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하숙집을 정리하면서 텔레비전이 아직은 쓸 만하고 정도 듬뿍 들었기에 버리기가 아까워 시댁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근무지가 바뀌면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몇 년간의 생활도 정리하게 되었고, 다른 곳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기면서 이 물건은 그냥 우리 방에 두고서 나왔다.

시골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지금은 고등학생이 됐다. 올해로 아이는 예전에 내가 객지 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나이가 됐다. 아직도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서 쌩쌩 잘 돌아가는 이 텔레비전이 주말 저녁이면 찾아가는 나와 가족에게 유쾌한 프로그램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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