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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죽을 때 가져갈 책

등록 2008-06-05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윤정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결혼 직후 스페인에서 2년여를 살았다. 그 값진 시간이 벌써 20년 이상이 흘렀다. 마드리드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프라도 미술관과 왕궁, 레티로 공원을 구경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하지만 그란비아라는 거리의 한 책방에서 벼르고 별러 스페인어 서적을 사 모으는 것은 내 마리도(남편)의 큰 기쁨이었다. 읽지도 않은 새 책을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하다며 나이 들어 시간이 많아지면 그 책들을 열심히 읽을 것이라 했다. 2년 뒤 한국으로 보내는 짐은 스페인산 리오하 포도주 몇 박스와 스페인어 서적 몇 박스, 그리고 해적선에나 나올 법한 가죽함 1개가 전부였다.

그동안 세 명의 가족이 더 늘어났고 기저귀와 장남감들이 우리 짐을 압도하던 시절도 이젠 옛일이 돼버렸다.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몇 번의 탈바꿈을 했고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짐을 싸고 푸느라 골병이 들 지경에 이른 적도 많다. 옛 기억이 서린 물건들을 과감히 처분해야 할 때도 많았다.

며칠 전 식탁 위에서 맥주 캔을 땄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었다. “베란다에 쌓여 있는 박스 여섯 개 언제 처분할까? 지금이라도 오케이하시지!” 언젠가 읽겠노라고 스페인에서 사 모은 책 박스가 여전히 집 베란다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누렇게 변색돼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책들이 되어서 말이다. 맥주 캔이 다 빌 때까지 남편은 특유의 딴청을 피우며 열심히 다른 얘기를 했다.

오늘 나는 할인점에 가서 단단한 종이상자 여섯 개를 사올 수밖에 없었다. 그 책들을 잘 털고 말려서 차곡차곡 넣어둘 요량이 생겼다. 그날 튀어나온 남편의 대답에 나의 뇌 한 부분이 먹먹해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기꺼이 내 무덤에 같이 묻어줄 수 있다면, 아니면 화장할 때 같이 태워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노라”라고 말했다. 더 이상 그 책들을 처분하라는 압박 따위는 가할 수 없으리라.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하도록 세상은 요구하지만 그런 다그침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가지가 바로 남편의 오래된 책 강박이 아닐까 한다. 그 책들은 특별한 추억이 담긴, 남편의 특별한 물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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