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윤정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결혼 직후 스페인에서 2년여를 살았다. 그 값진 시간이 벌써 20년 이상이 흘렀다. 마드리드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프라도 미술관과 왕궁, 레티로 공원을 구경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하지만 그란비아라는 거리의 한 책방에서 벼르고 별러 스페인어 서적을 사 모으는 것은 내 마리도(남편)의 큰 기쁨이었다. 읽지도 않은 새 책을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하다며 나이 들어 시간이 많아지면 그 책들을 열심히 읽을 것이라 했다. 2년 뒤 한국으로 보내는 짐은 스페인산 리오하 포도주 몇 박스와 스페인어 서적 몇 박스, 그리고 해적선에나 나올 법한 가죽함 1개가 전부였다.

그동안 세 명의 가족이 더 늘어났고 기저귀와 장남감들이 우리 짐을 압도하던 시절도 이젠 옛일이 돼버렸다.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몇 번의 탈바꿈을 했고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짐을 싸고 푸느라 골병이 들 지경에 이른 적도 많다. 옛 기억이 서린 물건들을 과감히 처분해야 할 때도 많았다.
며칠 전 식탁 위에서 맥주 캔을 땄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었다. “베란다에 쌓여 있는 박스 여섯 개 언제 처분할까? 지금이라도 오케이하시지!” 언젠가 읽겠노라고 스페인에서 사 모은 책 박스가 여전히 집 베란다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누렇게 변색돼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책들이 되어서 말이다. 맥주 캔이 다 빌 때까지 남편은 특유의 딴청을 피우며 열심히 다른 얘기를 했다.
오늘 나는 할인점에 가서 단단한 종이상자 여섯 개를 사올 수밖에 없었다. 그 책들을 잘 털고 말려서 차곡차곡 넣어둘 요량이 생겼다. 그날 튀어나온 남편의 대답에 나의 뇌 한 부분이 먹먹해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기꺼이 내 무덤에 같이 묻어줄 수 있다면, 아니면 화장할 때 같이 태워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노라”라고 말했다. 더 이상 그 책들을 처분하라는 압박 따위는 가할 수 없으리라.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하도록 세상은 요구하지만 그런 다그침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가지가 바로 남편의 오래된 책 강박이 아닐까 한다. 그 책들은 특별한 추억이 담긴, 남편의 특별한 물건이 되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보복 나서는 이란 “미 항모 4발 타격”…미국 “미사일 근접 못해”

국힘, 필리버스터 백기투항…TK여론 악화로 행정통합법 처리 ‘다급’

하메네이 참석 회의 첩보 입수…거처 등에 ‘폭탄 30발’ 투하

이란 최소 200명 사망…CNN “보복으로 미국 본토 공격 가능성”

미군 사령부 ‘명중’ 시킨 이란…미 방공미사일 고갈 가능성 촉각
![‘조희대 대법원장’ 자체가 위헌이다 [아침햇발] ‘조희대 대법원장’ 자체가 위헌이다 [아침햇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301/53_17723445090457_20260301501521.jpg)
‘조희대 대법원장’ 자체가 위헌이다 [아침햇발]

하메네이 전권 위임받은 라리자니 “미국, 후회하게 만들겠다”

말에 ‘뼈’ 있는 홍준표…배현진 겨냥 “송파 분탕치는 정치인 정리해야”
![왜 부자는 수돗물 마시고 가난하면 병생수 마실까 [.txt] 왜 부자는 수돗물 마시고 가난하면 병생수 마실까 [.txt]](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301/53_17723391952718_511772339139994.jpg)
왜 부자는 수돗물 마시고 가난하면 병생수 마실까 [.txt]

“장동혁, 윤석열 껴안더니 부정선거 음모론까지”…개혁신당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