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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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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엄마와 크레파스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강림 경기 일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알뜰벼룩시장에서 산 크레파스. 300원을 주었는지 500원을 주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누군가 쓰던 것을 우리가 사서 쓴 지 2년이 넘었으니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3살도 안 된 아이에게 줄 크레파스라 어차피 부러질 거라는 예상으로 벼룩시장에서 사줬다. 아이의 첫 크레파스이니 새것으로 하나 살 법도 한데 그냥 그렇게 사줬다. 색깔이 다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부러지거나 뭉툭한 것도 있고, 대부분 포장이 다 벗겨져 있었다. 그래도 고맙게도 딸아이는 이걸로 나비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엄마아빠 얼굴도 그려주곤 한다.

어제는 아이가 크레파스를 손에 잔뜩 묻힌 걸 보고 데려가 손을 씻겨주면서 포장이 돼 있으면 손이 이렇게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같이 색종이로 돌돌 말아 싸볼까 했더니 아이가 좋다면서 얼른 색종이와 스카치테이프를 들고 왔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아이와 함께 사진 속 크레파스처럼 포장을 모두 했다. 포장하기 전에 뒤엉켜 서로 색이 묻어 지저분해 보이는 크레파스통과 크레파스를 일단 휴지와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아주고 포장까지 하니 크레파스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어릴 때 기억이 났다. 위로 언니 둘. 옷이며 학용품이며 나눠쓰고 물려쓰는 게 당연한데, 막내의 욕심에 투정도 부리고 꼭 새걸로만 사달라던 고집쟁이가 바로 나였다. 그런 날 어르고 달래면서 큰언니는 늘 이렇게 해줬다. 휴지로 크레파스를 닦고 케이스도 닦고 예쁜 색종이로 알록달록 돌돌 말아 색이름도 써주고 정말 예쁘게 꾸며줬다. 예쁘다고는 느끼면서도 새것이 아니라고 몇 번은 엄마를 졸라 결국 새 크레파스를 들고 학교에 갔던 나. 그랬던 내가 아이에게 “친구들 중에 새 크레파스를 들고 학교에 오는 아이도 있을 거야. 그런데 해인이는 집에 이렇게 쓰던 크레파스가 있으니 이거 다 쓰면 나중에 사줄게. 짜잔~ 이거 봐. 몰라보게 달라졌지? 예쁘지?”라는 말을 해주고 있다니.

엄마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아이를 키우면서 알 듯 모를 듯 그런 순간이 참 많은 걸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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