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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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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닳고 닳은 옥편이 좋다

등록 2007-06-08 00:00 수정 2020-05-03 04:24

▣ 이경희 충북 청주시 봉명동


묵은 게 좋다. 사람도 물건도. 나는 낯가림이 심해서 사람을 쉽게 사귀지는 못하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래오래 만나면서 흉허물을 털어놓고 늙을 때까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런 만남이 좋다. 물건도 낡아서 못 쓰게 되었으면 몰라도 나와 인연을 맺은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2년 연속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옷이라면 가차 없이 버리라고, 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이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고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나랑 동갑인 68년생 옥편이다. 비닐가죽이 자꾸만 말려 올라가고 제본이 떨어져 껍데기와 분리되는 동아출판사에서 발행된 350원짜리 콘사이스활용옥편. 누가 처음 썼는지는 모르지만 옥편을 펼쳐보면 여러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큰언니의 펜팔 친구였을까? 충남 아산군 둔포면 한○○씨의 이름도 있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6개의 도장도 찍혀 있고, 잘 쓰지 않는 장미(薔薇)라는 한자도 적혀 있다. 막 연필을 잡고 글씨를 배우고 싶었던 막내는 앞뒤 부수색인(部首索引)과 자음색인(字音索引) 페이지 숫자마다 서툰 솜씨로 동그라미를 그려놨는데 수백 개는 되어 보인다.

한자를 찾으면 영어에 일어까지 있고 적절한 단어 설명까지 잘돼 있어 지금 쓰는 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크고 두꺼운, 더 많은 한자가 수록돼 있는 다른 옥편도 있지만 500여 쪽 6천여 한자가 수록돼 있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것이 좋아서 늘 내 옆에 둔다. 아마도 나와 삶을 끝까지 함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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