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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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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작은 고추가 맵다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 황복희 대전시 동구 성남동

봄은 오는가 싶지만 어느새 가는 계절이지 싶다. 이제 낮에는 완연한 여름처럼 더우니 말이다. 오늘도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퇴근길엔 입맛도 없고 해서 보리밥을 사 먹기로 했다. 그런데 보리밥과 함께 상에 오른 청양고추가 어찌나 맵던지 하나만 먹었는데도 입에선 계속 불이 났다. 집에 와서도 더운 기운이 달아나지 않기에 선풍기를 찾으러 다락에 올라갔다. 거기서 지난여름 이후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선풍기를 찾아서 갖고 내려왔다. 사진에서 보듯 이 선풍기는 여전히 앙증맞고 귀여운 녀석이다.

선풍기를 꺼내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자니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이 선풍기를 산 건 딸이 중학교에 진학하던 지난 8년 전이다. 당시 남편이 장사에서 크게 실패해 빈곤의 먹구름이 하늘을 새까맣게 덮었다. 그래서 달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싸구려 누옥인 까닭에 여름이면 더워서 살 재간이 없었다. 그해 여름, 딸과 함께 선풍기를 사러 갔는데 딸은 이 선풍기가 자신처럼 작고 깜찍하다며 사달라고 졸랐다. 비록 보기엔 작고 볼품없었지만 사 가지고 와 집에서 가동해보니 단소정한(短小精悍), 즉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에 걸맞게 울트라 파워의 강풍을 자랑했다. 딸은 여름마다 이 선풍기를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공부에 전념했다. 여전히 빈궁했기에 남들 다 보낸다는 학원도 언감생심이었지만 딸은 풍랑을 탓하지 않는 어부처럼 묵묵히 공부를 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늘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딸아이는 재작년,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합격해 서울로 유학을 갔다.

다 아는 얘기겠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은 체구가 작아도 끈기와 인내심이 강해 무슨 일이든 해낸다는 뜻이다. 딸의 손때가 가득 묻어 있는 ‘애장품’을 꺼내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자니 다시금 사랑하는 딸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여름이면 한증막과도 같았던 누옥에서 가난과 열악한 환경까지 몰아내고 결국엔 명문대생이 된 딸을 생각하면 자랑스럽다. 내 행복과 자부심의 화수분이다. 조만간 딸도 볼 겸 맛난 것도 사줄 요량으로 상경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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