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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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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딸의 돋보기를 꺼내며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 홍경석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건 총알이 아니라 세월이다. 그와 비례해 인생도 가파르게 저물어간다. 그런 까닭으로 나 또한 순식간에 안경을 쓰지 않으면 멀리 있는 물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됐다.

평소 독서를 즐기기에 각양각색의 도서를 접한다. 한데 전기를 아낀다고 집의 형광등은 늘 어두컴컴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차라리 고문일 정도였다. 그러다가 올 2월에 딸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경제적 부담을 조금 덜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전 맘을 크게 먹고 안방의 형광등을 최신형으로 교체했다. 안방의 조도가 높아지자 그동안 미뤘던 책 읽기에도 한층 더 분발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놈의 시력이었다. 과거엔 양쪽의 시력이 모두 1.5였으나 인생의 연식이 오래되다 보니 시나브로 나의 시력도 ‘맛이 가기’에 이르렀다.

오늘도 퇴근해 신문을 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작은 글씨는 당최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딸의 책상 서랍을 열어 녀석이 과거에 사용했던 돋보기를 꺼내는 수밖에는.

사진의 돋보기는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사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딸은 이제 어언 스무 살이 되었으니 이 돋보기의 연륜도 10년하고도 거기에 두세 살을 더 붙여야 한다. 딸은 이 돋보기를 구입한 뒤 어찌어찌 요긴하게 사용했을 터이다. 그러다가 중고등 학교에 이어 대학에까지 진학한 지금껏 이 돋보기는 딸의 책상 서랍에서 그간 어쩌면 ‘똥 친 막대기’ 모양으로 그렇게 치지도외의 외로운 나날을 와신상담으로 점철했다. 그랬던 돋보기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건 오로지 나의 시력 저하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여간 돋보기를 이용하자니 작은 글씨도 크게 잘 보여 마음까지 후련하다.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요즘엔 글자뿐만 아니라 거개의 사물 또한 제대로 안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월이라는 건 대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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