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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손자가 읽는 아들의 책

등록 2007-01-13 00:00 수정 2020-05-03 04:24

▣ 전유미

큰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작은아들이 2학년 되던 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50권 중에서 10권을 골라 사주었다. ‘고대편’ 4권과 ‘영국편’ 6권이었다. 한 권에 500원이었으니 10권이면 5천원,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 큰 결심을 하고 산 셈이다. 그래서 3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도 아이들과 나는 이 책들을 늘 소중히 챙겨왔다.

육십 중반의 나이에 며느리를 맞이하면서 “네 남편이 초등학교 때 구입한 책이다”라고 말하며 책을 넘겨준 지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손자들이 초등학생, 중학생이다. 이제는 어느새 훌쩍 자란 손자들이 누렇게 바랜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아버지가 읽었던 책이에요? 와, 아버지가 공부하던 그때는 책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즐겁게 보곤 한다. 때로는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책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는 손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모른다.

화려하고 깨끗한 요즘 책에 비하면 볼품없을지 몰라도 자기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책이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보다. 이제는 여러 번 읽어 다 아는 내용일 텐데도 열심히 읽는 모습을 볼 때면 숱하게 이사를 하면서도 버리지 않고 간직해온 것이 정말 다행스럽다.

요즘 주변에 상태가 양호한 책들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안타까워지곤 한다. 살기 좋은 물질 만능의 시대인지라 뭔가를 구입하고 버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종종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손때 묻고 그만큼 정도 듬뿍 담긴 오래된 물건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읽던 책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간직하는 손자 혁주와 주현, 손녀 정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할머니는 너희를 사랑한단다. 하늘만큼, 땅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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