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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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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어린 딸을 감싸던 아빠의 모자

등록 2007-01-06 00:00 수정 2020-05-03 04:24

▣ 홍윤정
사진 속의 여자 아이는 제 딸입니다. 1989년 12월생으로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인데, 벌써 내년이면 수능시험을 봅니다. 딸아이가 아빠의 새로 산 등산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했네요. 1991년 1월의 어느 일요일, 임진각으로 잠깐 나들이를 갔을 때 딸이 추울까봐 아빠가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군요.
제 남편은 산행을 아주 좋아합니다. 크게 돈 안 들이고도 생산적이고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는 등산은 남편에게 여러모로 유용한 여가 활동입니다. 남편은 겨울에 산행을 할 때는 애정이 있어서인지 어김없이 그 모자를 썼는데 16년 이상을 남편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친구처럼 아주 편안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며칠 전에 남편과 함께 정기적으로 등산을 하는 친구들 중 한 명이 드디어 솔직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같이 등산할 때는 그 모자 좀 제발 쓰지 말아라. 너무 나이 들어 보여서 보는 내가 힘이 빠진다”라고 말이죠.

하긴, 요즘엔 각종 등산 용품들의 품질이 너무 좋아져서 그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남편은 작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해서 정이 많이 가는 모자이긴 하지만 교체할 때가 된 것 같다고요. 멋지고 가볍고 보온도 잘 되는 최신식 등산 모자를 하나 사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편도 저도 그 모자를 버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 서로가 잘 압니다. 지난 세월의 추억이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 등산 모자는 옷장 속에서 남편의 물건으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어쩌면 추운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귀가하는 딸아이 마중 나갈 때 손에 쥐고 나갈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빨갛게 언 딸의 귀를 녹여주었던 모자를 추억하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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