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옥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1990년대 중반 고교 시절 나의 제2외국어는 일본어였다. 어느 날 일어 선생님이 시청각교실에 모이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윽고 수업시간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준비해온 시청각자료를 틀었는데 그건 바로 ‘토나리노 토토로’, 다시 말해 <이웃집의 토토로>였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아 ‘아니메’가 흔치 않던 시절, 비디오에 자막도 없었지만 여고생들은 이내 토토로의 세계에 빨려들어갔다.
“끼.야.아.아.악. 너.무.귀.여.워.” 누가 여고생을 보고 말똥이 굴러가도 웃음이 나고 낙엽이 떨어져도 눈물이 나는 종들이라 칭했던가. 역시나 3% 부족한 표현이다. 비 내리는 날 우산을 쓴 채 버스 정류장에 등장한 1번 토토로가 꺼어엉충 뛰던 장면에서, 메이네 자매가 발이 여러 개 달린 고양이 버스를 타고 들판을 누비던 장면에서 반 아이들은 연방 귀엽다고 감탄사를 터뜨리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80년대 금서의 기쁨도 이런 것이었을까? 90년대에 온 금기의 아니메는 우리에게 문화 선구자의 기쁨 또한 안겨줬다.
그 뒤 어느 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서울 명동 시내로 땡땡이 나간 친구들이 헐레벌떡 교실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토토로 인형. 문화관광부의 허가도 없이, 라이선스 지불도 생략한 채 명동 한복판에 수북이 쌓여 있던 복제 ‘야매’ 인형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랴. 이름도 어려운 검댕 먼지 ‘맛쿠로쿠로스케’도 함께였다.
우린 당장 신청자 목록을 작성했다. 며칠 뒤 대표자들은 수십 마리의 토토로를 구매해 보따리장수처럼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지금껏 옷장 손잡이에 매달린 채 먼지를 먹고 있는 작은 토토로 인형은 한 시절 예수도 질투할 만큼 여고생들의 숭배를 한몸에 누리던 대단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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