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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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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흘러간 가요와 화투패 떼기

등록 2006-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저희 어머니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귀국한 사이,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소개로 만나 그만 한국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귀국하면서 챙겨온 어머니의 독일 물건들 중에 가장 값이 나갔던 것이 이 턴테이블과 컬러텔레비전이었습니다.

70년대 후반, 국내에서는 아직 컬러 방송이 시작되지 않았을뿐더러, 유럽식 PAL 방식을 차용하고 있던 텔레비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꾀를 내어 국내 모 가전회사 연구실에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기 이런 물건이 있으니 생각 있으면 가져가시오” 하고요. 덕분에 새 텔레비전을 한 대 장만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틈만 나면 자랑스레 늘어놓으시던 에피소드입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돌아온 뒤 너무 바빠서 음악을 들으실 시간이 없었습니다. 가지고 온 다니엘 바렌보임의 베토벤이나 각종 성가곡 음반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처박혀 있게 되었고요.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한동안 턴테이블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던 적도 있지만 그때는 듣고 싶은 음반을 살 돈이 없었고, 훗날 여유가 생겼을 때는 CD로 업그레이드를 한 뒤였습니다. 요새 이 턴테이블은 명퇴한 뒤 흘러간 가요를 들으며 화투패 떼는 데 취미를 붙이신 아버지 차지가 되었습니다. 바늘이 다 되면 황학동에 나가 어떻게 구해오시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직장 동료들과 처음 술 한잔하러 갔던 날,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부서에 아버지가 교사이고 어머니가 간호사인 친구가 저 말고 둘이나 더 있었던 겁니다. ‘간호사+교사=출판편집자(제 현업입니다)’라는 공식이 있는 건가 하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만약 어머니가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서 광부나 유학생 같은 다른 한국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면 어떤 조합이 되었을까요? 새로 옮기게 될 회사에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장 보내준다면, 한번 그곳 교민들을 만나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박기영 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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