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집을 떠난 사람은 큰오빠였을 것이다. 큰오빠는 아버지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도시의 중학교로 공부하러 갔다. 그 다음은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사촌언니와 어깨동무를 하고, 아버지 상여를 꾸미던 타작마당에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다섯살이었다. 그 다음으로 큰언니가 집을 떠났다. 큰언니는 오색 종이테이프를 사슬 모양으로 만들어 장식한 초록색 시발택시를 타고 시집을 갔다. 둘째언니도 시발택시를 타고 시집을 갔다.
그 다음은 내가 집을 떠나왔다. 천지도 모르는 시골 계집아이가 공부해 출세하려고, 아버지 대신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도시로 나왔다. 그 뒤 열아홉 청년 꽃다운 작은오빠가 고통사고로 집을 떠나자, 어머니는 때때로 목을 놓고 울었다 한다. 새언니가 시집을 오고 조카가 태어난 뒤에 셋째언니도 시집을 갔다.
긴긴 세월 동안 우리 집에 있던 가족 사진은 막내인 내 차지가 되었다. 가끔 주말에 집에 갈 때면 그 사진을 정리했다.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나올 때 나는 몇장의 사진을 가지고 왔다.
양복 차림의 아버지 사진은 농사일 잘하고 풍물 잘 쳤다던 언니들 이야기 속의 아버지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낯설다. 아버지가 어머니 어깨에 손을 얹고 찍은 사진도 있다. 나뭇잎 모양의 테두리가 있는 오빠들 명함판 사진도 있고, 단발머리에 주름치마를 입은 둘째언니와 긴 커트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셋째언니 사진도 있다. 마당 끝 아주까리밭에서 네 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은 잉크가 묻어 선명하지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큰언니 사진이다. 삼단 같은 머리를 곱게 땋아내려 댕기를 드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감춘 큰언니의 옆모습은 조선 백자 달항아리 같다.
가족들과 선생님들께 죄송하게도, 나는 출세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지만, 내 컴퓨터 배경화면에 큰언니 사진을 띄워놓고 보고 또 본다. 백자 달항아리같이 눈부시던 큰언니는 병든 남편을 수십년이나 수발하며 농사일까지 하는 바람에, 눈이 퀭하고 손톱 끝이 다 닳아버린 촌할머니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서병련/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윤석열, 나랏돈으로 캣타워 500만원에 ‘히노키 욕조’ 2천만원
윤석열 40분간 “계엄은 평화적 메시지”…판사도 발언 ‘시간조절’ 당부
윤석열, 검찰 향해 “무논리 모자이크 공소장”…법원에도 “중구난방”
청와대 인산인해…“대선 뒤 못 올지도” “용산으로 왜 옮겼는지 의문”
구속 취소, 촬영 불허, 직업 대독...지귀연 판사, 윤석열 봐주기 구설
스포츠윤리센터, 유승민 징계 요청…“탁구협회 후원금 유치 근거 없어”
공수처 인사위원이 한덕수 고소…“검사 7명 임명 미뤄 직무유기”
[뉴스 다이브] 분노 유발 윤석열과 내란 옹호 의심되는 지귀연 재판부
말 바꾼 윤석열 “계엄 길어야 하루”…헌재선 “며칠 예상”
트럼프 “대선 출마?” 한덕수와 통화 유출…“기밀누설 조사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