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무렵, 아빠는 항상 부재 중이셨습니다. 한창 건설 경기가 달아올랐던 80년대 초반, 우리 아빠도 중동에 건설역군으로 파견됐지요. 가족을 위해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가신 우리 아빠. 하지만 그때 저는, 젊은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낯선 이국으로 떠나시는 아빠의 착잡한 심정을 헤아리기엔 너무 어렸습니다. 그저 아빠, 엄마 손 잡고 ‘용인자연농원’에 못 가는 게 서운하기만 했지요. 안양 유원지에서 아빠랑 물장구 치며 노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아빠의 부재가 아쉬웠습니다.
자상하신 우리 아빠는, 한국에 돌아가는 직원이 있으면 꼭 선물을 한 보따리 들려서 보냈습니다. 그럼 엄마는 그 직원과 김포공항에서 접선해 선물을 받아왔지요. 엄마가 선물을 하나씩 끄집어내기 시작하면 언니랑 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숨죽인 채 주시했지요. 선물 꾸러미는 마치 요술상자 같았어요. 죄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지요. 전자 손목시계, 샤프, 미니 초콜릿, 금고 저금통…. 전자시계도 신기했지만 제 마음에 쏙 들었던 건 금고 저금통이었어요. 금고 저금통은 빨간 꿀꿀이 저금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은행금고처럼 비밀번호가 있어서 아무 때나 돈을 넣고 뺄 수 있었지요. 제법 폼도 나고 스릴도 느껴졌습니다. (사실 가족들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 다른 이가 비밀번호를 알아챌세라 다이얼을 맞출 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재빨리 돈을 꺼내던 기억이 납니다. 마치 첩보원처럼 말이죠.
그 옛날 한 소녀의 ‘자부심’이었던 금고 저금통. 이젠 녹슬고 칠이 벗겨져서 영 볼품이 없네요. 저금통 안에는 1원, 5원짜리 동전과 기념주화 몇개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입니다. 지폐와 동전은 귀엽고 깜찍한 토끼 저금통 뱃속에 차 있습니다. 그래도 23년 동안 수차례 이사를 다니면서 ‘버릴까 말까’ 망설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버리면 안 될 것 같고, 버리기 싫었습니다.
아마 금고 저금통은 평생 버리지 못할 겁니다. 중동으로 돈 벌러 가셨던 아빠가 사주신 거니까요. 어린 시절 소중한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으니까요. 이젠 하늘의 별이 되신 아빠를 추억하게 해주는 기특한 물건이니까요. 금고 저금통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납니다. 자꾸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버리지 못합니다.
문수경/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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