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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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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납작한 파랑 조끼

등록 2005-02-17 00:00 수정 2020-05-03 04:24

보일러를 멈춰놓고 조끼를 걸친다. 낮이고 저녁이고 따뜻해도 왠지 좀 허전하다 싶을 때면 찾아입게 되는 나의 파랑 조끼!

가끔은 남편이 입을 때도 있는데 주로 화장실 갈 때(우리집 화장실이 좀 춥다) 덧입거나 나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입는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나밖에 볼 사람도 없으니 그는 작은 조끼를 입고서도 당당하다.

10여년 전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판매대에 놓인 이 녀석이 마음에 쏙 들어 좋아라 하며 집어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판가라 가격도 굉장히 저렴했다. 처음엔 패딩 조끼에 걸맞게 제법 두툼해서 외출할 때 요긴하게 입었는데, 솜이 납작해지면서 이젠 실내에서 입기 딱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10년을 입었지만 흠집이라곤 뒷솔기가 10cm 정도 터져서 내 볼품없는 바느질 솜씨로 감침질을 한 것과 앞판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얼룩 정도다. 여전히 따뜻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20대에는 파랑 조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만큼 원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옷장에는 한데 뭉쳐 보이는 검정, 회색, 밤색의 옷들이 대부분이다. 분명히 옷가게에서 내 눈이 가는 옷은 따로 있지만 사들고 와서 보면 항상 비슷한 색의 옷으로 바뀌어 있다. 그래서 그런 옷들 위에 겹쳐 입으면 이 파랑 조끼가 생뚱맞아 보일 텐데도, 예나 지금이나 옷 입는 일에선 남의 이목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난, 오늘도 가스비를 아끼겠다고 파랑 조끼를 걸치고 앉아 있다. 요즘은 그 조끼 위에 한 녀석이 더 있다. 잠이 와서 칭얼대는 둘째 녀석을 업고 앉아 있으니 다리도 저려온다. 그래도 따뜻해서 참 좋다.

한영옥/ 인천시 남동구 남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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