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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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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얼룩투성이 배낭

등록 2005-0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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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지, 버려야지….” 집안을 정리할 때마다 이 ‘흉물스런’ 물건을 보고 다짐했지만 아직까지 버리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얼룩들이 너무 많아서이다. 그것은 배낭 곳곳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세월의 두께 같은 것이다.

재수 시절 햇볕 한줌 들지 않는 마음을 안고 찾아간 추자도. 기어이 절벽 끝까지 기어올라서 생전 처음 보는 시퍼런 ‘진짜’ 바다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행의 동반자였던 사촌형에게 “바다가 무서워”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처럼 바다도 무서웠다. 어쨌든 그 인상적인 ‘바다 구경’ 덕분에 당시만 해도 탱탱한 젊음을 유지하던 내 배낭에는 첫 생채기가 생겼다.

군 입대를 위해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친구와 함께 찾은 지리산.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뱀사골 계곡에서 잠시 무거운 배낭을 내리고 숨을 돌렸다. 배낭을 다시 메려는 순간, 아뿔싸, 두툼한 인분이 깔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만신창이가 된 배낭을 수습하려 하면 할수록 흉터들이 늘어갈 뿐이었다. 어쨌든 냄새 난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투덜대던 친구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험난한 능선을 넘었다.

지나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러나 당시엔 괴롭기만 했던 시간들. 배낭은 나를 부축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다. 나는 배낭과 함께 시련의 아픔을 삭이며 산장에서 숨죽여 울던 대학원생을 만났고, 전국 일주를 신혼여행 코스로 잡은 괴짜 부부의 밥을 얻어먹었고, 곰방대를 연방 빨아대던 촌로의 심심함을 달래주었다.

지금은 내게도 튼튼하고 멋들어진 새 배낭이 생겼다. 천덕꾸러기처럼 장롱 위에 구겨져 있는 얼룩투성이 파란 배낭을 볼 때마다 그의 장례를 언제 치러줘야 할지 생각한다. 나는 아주 오래오래 그런 걱정만 하게 될 것이다.

유주석/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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