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쉴 때 같이 쉬면 네 인생 쉰내 난다!’
예로부터 학생들이 나태해지는 방학과 연휴는 학원가의 성수기. 초장기 연휴가 예정된 올 추석,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는 학부모와 학생 2인 1조로 귀성/귀경과 영어/역사/체험학습을 함께할 버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열공 잼보리(Jam-Barley) 버스’. 추석 연휴 전날 강남역, 스카우트복을 입은 고인층과 중학생 딸 민희가 ‘부산행’ 잼보리 버스로 뛰어갔다.
“헤이 스톱!” ‘하버드 졸업생’(I’m a graduate of Havard)이라고 적힌 재킷을 입은 한총리 원장이 두 사람을 제지했다. “유어 패밀리 삼등칸. 백도어! 노 노! 그 문 말고 버스 꽁무니에 작은 문 있어요.”
쥐구멍 같은 문으로 들어가 뒷좌석에 구겨 앉자, 아빠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이 자리 구하려고 새벽에 피시(PC)방에서 광클했다. 코인만 안 처박았어도 앞자리 앉는 건데.” 민희가 토끼 헤드폰을 쓰며 말했다. “아빠, 코인 타령 좀 그만.” 그때 요란한 군악대 연주와 함께 누군가 운전석에 올랐다. 한총리가 소개했다. “이번 잼보리 버스의 드라이버는 검사짱, 윤기사님이십니다.” 앞쪽 일등석에서 요란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앗, 저분은 학원가 숙제검사를 도맡아 하던 분이잖아요? 왜 전문 운전사에게 맡기지 않고.” 민희가 묻자 아빠가 말했다. “지난번 운전사가 내로남불로 인기를 잃었잖아. 윤기사님은 지위 고하를 안 가리고 칼같이 숙제검사를 해온 분이니, 모든 걸 공정하게 처리해줄 거란다. 얼마 전 모의고사에서도 학원 카르텔이 짬짜미로 만든 문항을 다 잘라주셨잖아. 일타강사들이 돈벌이하려고 만든 콜라문항 말이야.” 민희가 말했다. “킬러문항이 아니고 콜라문항이었어요? 아, 그래서 바꾼 게 막걸리문항이구나.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아무나 맞히는.”
버스는 고속도로에 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비틀비틀 경기도 양평행 우회도로로 들어섰다. 미심쩍은 표정의 민희에게 아빠가 말했다. “귀성 차량으로 도로가 막혀서 그런가봐.” 한참 뒤 버스는 코파나 휴게소에 들어섰고, 화려한 외모의 여성이 달려와 윤기사를 의자에서 일어나게 도와줬다. 윤기사는 여성을 따라온 남자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처남, 고생이 많지. 장모님은 곧 나오실 테니 걱정 마.”
승객들이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서 돌아오는데 가격이 비싸다는 불만이 튀어나왔다. 민희의 옆자리에 앉은 한기자가 주최 쪽인 원국토 강사에게 항의했다. “혹시 기사님 가족들 장사시켜주려고 불필요하게 돌아온 거 아닙니까?” 원국토는 발끈 화냈다. “무슨 소립니까? 버스 노선은 저희 직원들이 타당성을 조사해서 정했고 윤기사님은 아무 관계 없어요.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버스 운행 백지화할까요? 전부 서울로 돌아가요?”
다시 버스가 출발하자 학생들은 태블릿피시를 꺼내 인터넷 강의를 보기 시작했다. 아빠의 눈초리에 민희도 태블릿피시를 폈다가 눈이 툭 튀어나왔다. “차내 와이파이가 유료인데 요금이 장난 아니에요.” “어, 그러네. 삼등석은 별도 요금이구나.” 그때 이등석에서 누군가 말했다. “아니, 휴대전화 충전이랑 공용 티브이(TV)도 별도 요금을 받아요? 작년엔 안 그랬잖아요.”
한총리가 안경 안의 눈을 끔벅거렸다. “요즘 인터내셔널 오일 달러 상승으로 어쩔 수 없이 일부 요금을 인상했습니다. 원래 전임 드라이버가 올렸어야 하는데 포퓰리즘으로 적자폭만 늘고….” 한기자가 말했다. “여기 화물칸에 기업체 추석 택배를 잔뜩 실었는데, 그건 요금을 엄청 깎아줬더라고요. 또 작년까진 일등석에 서비스 요금이 추가됐는데 올해는 거의 감면해줬고요. 그런 쪽에 새는 비용을 뒷자리 승객들에게 부과하는 거 아닙니까?” “노 노, 페이크 뉴스로 승객들 현혹하지 마세요. 정 싫으시면 내려서 택시 타고 가시든지요.” “뭐라고요? 여기서 부산까지 택시요금이 얼만데요?” “그, 기본요금이 1천원 정도 하지 않나요?”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충북 오송에 이르자, 창밖이 깜깜해지고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윤기사가 지하차도 입구에 버스를 세우곤 밖으로 나가더니, 별도의 차량에 올라타 어딘가로 가버렸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차량들이 급히 돌아나왔다. “지하차도가 물에 완전히 잠겼어요. 여기도 위험해요.” 지나던 차량이 알려주자 주최 쪽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했다. “아니 이럴 때 기사는 어디 간 거야?” 승객들이 항의하자 한총리가 중얼거렸다. “그게 윤기사님은 세계 학원 엑스포 유치 관계로 오송역에 갔다가 우크라이나 관광협회장과 회담이 있어서….” “그게 말이 돼요?” 승객들이 소리치자, 한총리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아, 기사님. 또 한 곡 뽑고 계시네요. <아메리칸 파이>, 명곡이죠. 그런데 여기 폭우가… 네, 네, 당장 뛰어오셔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순 없긴 하죠. 네.”
대리기사를 불러 겨우 버스를 빼내고 난 뒤 윤기사가 도착했다. “저도 어이가 없네요. 방송에서 폭우와 산사태 소식을 듣고선…. 이야, 살면서 이런 걸 처음 봤다 싶더라고요. 전임 기사가 버스 관리를 잘해뒀으면 이런 사태에도….” 한기자가 벌떡 일어났다. “또 또 전임 기사 탓입니까? 좀 전에 화물칸 열리면서 학생들 가방이 전부 강에 빠졌어요. 이건 어떻게 합니까?” 윤기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여기 해병대 사단장이 제 말이면 끔뻑 죽어요.” 해병대원들이 곧바로 달려왔고 인간 띠를 만들어 하천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민희가 겁에 질려 말했다. “아빠, 저 오빠들 너무 위험하잖아요. 구명조끼도 안 입고.” 아빠가 재빨리 입을 막았다. “어허, 지금은 기사님에게 힘을 실어줄 때야. 자칫해서 저 좌파 한기자 같은 사람이 나서면 혼란이 생긴다고.”
하늘이 개자 버스가 운행을 재개했다. 현충원에 가까워오자 한총리가 개인 학습을 중지시키고 차내 TV로 이승만·백선엽 찬양 방송을 보게 했다. 이어 도로 입구에 버스가 섰다. 한총리가 말했다. “스카우트 앤 패밀리. 레츠 체험활동! 이곳에 이상한 이름의 도로가 있으니 모두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표지판을 지워주세요.” 한기자가 얼굴이 벌게졌다. “홍범도로를 말하는 겁니까? 의병과 독립군 활동으로 한국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신 분인데.” 한총리가 말했다. “노 노. 행적이 어쨌든 소비에트 코뮤니스트 파티에 입당한 파르티잔 아닙니까? 자유시 참변에도 개입했고…. 이래서 히스토리 재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학생들은 활동 배지를 얻기 위해 열심히 페인트칠했다. 민희는 ‘열공 잼보리 버스’가 어느 순간 ‘멸공 잼보리 버스’로 바뀌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홍범도다!” 현충원 방향에서 홍범도 장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윤기사는 학생들을 급히 버스에 태운 뒤 미친 듯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민희는 뒤창으로 꽁무니를 바짝 쫓아오는 홍범도를 보고 말했다. “어, 조각상이다!” 그제야 승객들은 뒤따라온 게 트럭에 실은 홍범도 흉상임을 알았다. 학생들은 이런 소문을 수군거렸다. 육사 교정에서 철거한 홍범도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보냈는데, 장군이 탈주해 곳곳의 친일파들을 찾아다닌다고.
해가 완전히 기울어진 뒤에야 버스는 새만금에 도착했다. 스카우트들은 신나는 야영 놀이를 즐길 수 있다는 기대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들 앞엔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든 진흙밭, 너덜거리는 텐트,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윙윙대는 모기떼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라면서 내주는 것은 잼과 보리밥뿐이었는데, 이 행사의 명칭이 잼버리가 아니라 잼보리라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잼보리 담당인 김여가 강사가 메가폰을 들었는데, 얼굴은 로봇 같고 말투는 챗지피티 같았다. “예측할 수 없는 폭염과 폭우로 어쩔 수 없이… 이곳 시설이 부실한 것은 지자체에서 제대로 준비를 안 해서… 역시 지방은 이런 행사를 진행할 역량이….”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저게?” 지쳐빠진 민희가 묻자 아빠가 말했다. “저 로봇 강사에겐 곧 없어질 반을 맡겼거든. 그래서 배터리 충전도 안 해줬다는구나.” 김여가의 전원이 꺼지자 김여가II로 대체됐다. 민희가 손 들고 말했다. “우리 의견도 들어주세요. 저희 야영 안 하고 다른 데 가면 안 돼요?” 김여가II는 단호했다.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이란 미사여구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한밤중에 요란한 앰뷸런스 소리가 울렸다. 민희가 푸세식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모기의 융단폭격으로 온몸이 팅팅 불어 쓰러졌다. 드디어 고인층도 참지 못해 주최 쪽에 항의하러 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민희 앞에 풀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 종이를 건넸다. “아빠, 이게 뭐야? 퇴영 허가서 같은 거야?” “그게 아니라 이거라도 그리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란다.” “이게 뭐예요? 윤기사님이랑 부인이 동물공장인가 하는 프로그램 나왔던 모습이잖아요. 이걸 왜 그려요?” “어허, 여기선 윤기사님이 왕이나 마찬가지야. 잘 보이면 너라도 특혜를 받을 수 있을 거야. 특히 부인은 눈도 크고 콧날도 오뚝하게 그려라.”
다음날 새만금을 떠나는 버스 안은 불만으로 가득 차 폭발 직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양복들이 큰 상자를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는 검사청 조사원들입니다. 숙제검사, 청소검사, 손톱검사 등 모든 검사를 하는 곳이죠. 최근 불순분자들이 암약한다는 첩보가 있어, 여러분의 가방을 압수수색하겠습니다.” 그들은 한기자의 가방을 집중적으로 뒤졌다. 그러곤 그의 아들 겨레의 가방에서 쪽지를 꺼냈다. “이건 뭐야?” 겨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끼리 잰말놀이하는 건데요. 저 엄청 빨리 읽거든요. 한번 해볼까요? ‘검찰청 영수증은 깐 영수증인가, 안 깐 영수증인가? 읍-읍-”
한기자와 겨레가 조용히 버스에서 사라졌고, 이어 방동위라는 사람이 차내 소음을 관리한다며 나섰다. “지금 우리 버스가 왜 제대로 못 가는지 알아요?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원스트라이크아웃으로 화물칸에 구금할 겁니다.” 방동위가 뒷짐 지고 좌석 사이를 순시하는데, 민희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빠, 저 사람 아들이 나랑 같은 초등학교 다녔어요. 학교폭력으로 엄청 말썽이었는데….” 아빠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그냥 모른 척해라.”
‘2030 엑스포의 도시, 부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드디어 버스가 부산에 들어서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 문이 열리면 먼저 뛰어내리려고 너나 할 것 없이 부산스럽게 짐을 챙겼다. 그런데 버스는 최종 목적지인 부산역이 아니라 광안리의 수산시장으로 향했다. 차내에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이 안전하다는 홍보 방송이 나오자, 모두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윤기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잼보리 여정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요즘 우리 어민들, 수산물시장 상인 여러분이 힘드신 거 다들 아시죠? 우리가 가서 파이팅하고 먹방도 찍고 그럽시다.” 모두 횟집에 들어가 요리상을 받았는데, 민희는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아니, 위험한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지 말라고 항의는 못할망정, 왜 나서서 일본 편을 들어요?” 술잔을 돌리며 식당 안을 오가던 윤기사가 그 말을 들었다. “어허, 또 광우병 괴담처럼. 뭐 하고 있나? 한총리 원장!”
한총리가 얼굴이 벌게져 민희를 나무라자 고인층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수산물이 위험한지 아닌지 나는 몰라요. 하지만 기사님과 운영진 식사 비용을 승객들이 추가로 내야 한다는데, 그 항목은 왜 공개를 안 합니까? 뭘 얼마나 먹었기에 이렇게나 나와요. 영수증이라도 좀 봅시다.” 한총리가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어허, 원래 기사님은 특활비로만 생활해오셔서 가격 이런 거 잘 모르세요. 영수증은 버스 안보를 위해 공개할 수 없고요.”
겨우 부산집에 도착한 민희는 할머니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싫어! 돌아갈 땐 다른 버스 타고 갈 거야.” 고인층은 6년 반 동안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건 안 돼. 이 버스는 왕복이거든. 돌아갈 때도 타고 가야 해.” “그런 게 어딨어. 저렇게 엉망인데, 언제까지 참으란 거야.”
할머니가 민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운전기사가 억수로 엉망이라 중간에 바꾼 적 있잖아. 안 그렇나? 승객들이 촛불을 들고.”
고인층이 펄떡 뛰었다. “어무이 말조심하이소. 그게 한 번 되지 두 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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