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당이 오랜 기간 5·18 민주화운동과 호남에 대해 무관심했죠. 호남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여러 이야기들… 망언을, 막말을 했어요. 그것을 한번에 해결한다는 건 교만한 생각이죠. 5·18이 지나서도 광주 분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소통하고, 더 나아가 공감하는 데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게 통합당 안 청년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낙선자가 앞으로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호남도 통합 못하면서 무슨 ‘통합당’
천하람(34·사진) 미래통합당 ‘청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을 5월12일 오전 10시께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날 아침 신문에 보도된 ‘통합당 청년들 `5·18 망언 사죄 광주 간다’는 제목의 기사가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다. 천 위원은 “청년 비대위에서 내부 논의 중이었는데 기사가 앞서 나갔다”고 난감해하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진정성 있게” “장기적으로” 등의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장기적으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5·18 기념식 이후에도 광주에서 고통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를, 아픔을 듣고 공감할 수 있어야죠. 언론에 비치는 것보다 광주 분들이 어떻게 느낄지를 최우선으로 두고,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광주에) 다가가려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에 맞춘 ‘일회성 보여주기’식 사죄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광주에 대한 당의 근본 인식을 바꿔서 다가가겠다는 희망이기도 했다. “호남도 통합할 수 없으면서 무슨 미래‘통합당’이에요?”
천 위원은 4·15 총선 때 통합당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던 ‘불모지’인 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갑 지역구에 도전해 4058표(3.02%)를 얻고 낙선했다. 순천이 고향이거나(더불어민주당 소병철 당선자·58.56%), 순천시장을 지냈거나(무소속 노관규 후보·31.69%), 18~19대 의원을 지낸(민중당 김선동 후보·4.42%) 이들에 밀려 4위에 그쳤다. 사람들은 대구 출신으로 꾸준히 ‘주류’의 길을 걸었던 그가 낙선을 각오하고 순천을 선택한 것을 의아해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천 위원은 이른바 ‘서울 명문대(고려대)’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돼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한변호사협회 제2법제이사 등을 거치며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는 이번 선거운동에 나서면서 ‘비주류’의 설움을 조금이나마 겪었다. 분홍색(통합당 색)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명함을 건네자마자 찢어버리는 유권자를 수없이 만났다. “대구로 가버려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나이가 어린데다 ‘2번 천하람’이라고 쓰인 분홍색 재킷을 입고 명함을 뿌리다보니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오인하는 유권자도 있었다.
선거 뒤에도 가족과 함께 순천서 살아
지역에서 “어차피 선거 끝나고 갈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던 그는, 현재 순천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변호사인 아내와 5살 아들이 함께 산다. 청년 비대위원으로서 순천과 서울을 오가며, 통합당이 ‘멀쩡한 보수’ ‘2020년에 맞는 새로운 보수’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진정한 사죄를 이야기하는 건 지금의 통합당이, 보수 진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이야기는 ‘보수’와 ‘통합당’으로 옮겨갔다.
통합당이 총선 패배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우리 당 구성원이 예전 잘나갈 때 향수가 너무 강한 것 같다. ‘예전처럼 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다. 그러면서 국민 탓, 바뀐 세상 탓을 한다.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언론이 좌편향됐다’ ‘우리 지지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이 부족하다’ ‘젊은층이 우리를 악마화한다’ 이런 기류가 많다. 부정선거 주장도(일부 통합당 낙선자의 개표 조작 의혹 제기) 그렇다. 바뀐 세상에 적응하는 능력이 낮다. ‘왜그 더 도그’(Wag the dog·꼬리가 개를 흔든다)란 말이 있잖나. 과거에 대한 향수가 많은, 목소리 큰 열성 지지층에 끌려다녔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선거 지고 나서 보수 유튜버를 탓하는데, 이제 와서 그러는 건 정말 비겁하다. 보수 유튜버는 당대표가 아닌데, 당이 명확한 메시지를 냈으면 왜 보수 유튜버에게 끌려다녔겠나. (선거 뒤 통합당 내부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당이 극우 성향의 일부 유튜버에게 휘둘렸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에 대해 지금도 찬반 논란이 진행 중이다. 김무성 의원은 5월11일 언론 인터뷰에서 유튜버들에 대해 “전부 돈 벌어먹으려고 하는 놈들”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통합당에 들어가서 보니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해 조국 전 장관 사태에 실망한 분들이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지지로 안 갔다. 보수 진영이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건가 생각이 들더라. 상식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보수 진영이 상식과 비상식에서 비상식을 택할 때가 많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인간적으로 아쉬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분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보수 정당이라고 하면 누구보다 법에 정해진 절차와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판단을 내린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보수 정당 본연의 태도가 아니다. 꽤 많은 국민이 ‘통합당은 내가 도저히 지지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정당’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장벽을 허물어야 국민에게 정책도 판단해달라고 할 수 있는데….
‘멀쩡한 보수’라는 게 무슨 뜻인가.
5·18을 부정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게 보수가 아니다. 겸손한 태도로 기존 것을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게 보수다. 이게 빠지면 수구가 되는 거다. 언제까지 70년대, 80년대 국가 주도 성장과 반공만 이야기할 수 있나. 그 시절에 맞는 보수가 있고 2020년, 바뀐 시대의 보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바뀌면서 남녀 평등, 소수자 차별 금지, 기본소득 등의 의제가 떠오르는 건 역사가 앞으로 가는 일이지 않은가. 그럼 보수도 앞으로 가야지. 보수주의자의 기본 역할은 사회의 기본 틀을 유지하며 변화에 맞춰 조금씩 개선하는 것이다. 급격한 변화로 사회가 붕괴하면 그건 보수의 실패다. 우리도 기본소득, 젠더 이슈에서 배제될 게 아니라 보수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21세기형 보수’를 찾아야 한다.
‘○○○ 키즈’라는 라벨, 청년정치 폄하
천 위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와 ‘현재 통합당’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느껴졌다. 통합당은 지난해 5·18 폄훼 논란에 올랐던 김순례·김진태·이종명 의원을 제대로 징계하지 않아 비판받았고, 이번 선거에서도 세월호 막말 논란에 휩싸였다. 여전히 ‘아스팔트 보수’에 휘둘리는 등 ‘21세기형 보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현재 통합당 안 열성 지지층에게서 비난받고 있었다. “‘민주당으로 가라’ ‘전라도로 가라’ 같은 메시지를 보내시죠.”
왜 통합당에 들어갔나.
전문직, 스타트업, 자영업자 등으로 이뤄진 3040세대가 ‘젊은 보수’라는 그룹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정치를 고민했다. 나는 ‘자유주의’에 가깝더라. 현 정부에서 재정 적자가 커지면 미래 세대는 어떻게 되냐는 문제의식이 강했고, 이걸 대변하는 의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공공 배달앱’처럼 정부가 플레이어가 되는 것보다 기업과 개인의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주고 뒤로 빠져 엄격한 심판, 관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지층이 반대해도 국가를 위해 필요한 정책이면 밀어붙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지지층만 믿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한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을 망각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청년 보수 정당을 창당하려 했다. 그런데 2월 보수 통합 흐름 속에 당시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이었던 정병국 의원과 박형준 통합당 전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등에게서 “생각을 실현하고 싶으면 당에 들어와서 사내 벤처처럼 활동해라. 당을 바꿔라”라는 말을 듣고 통합당에 합류했다.
왜 호남에 출마했나.
호남에도 정책 측면에선 보수 성향을 띤 분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5·18을 폄훼하는 통합당은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가져와도 안 찍는다는 분이 굉장히 많다. 그런 장벽을 조금이나마 허물 수 있는 게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우리 세대는 독재정권의 득을 본 게 없으니까. 호남도 통합할 수 없으면서 무슨 ‘미래통합당’이냐. 그럼 ‘영남당’이라는 이름을 쓰든지. 특히 순천의 이정현 의원(새누리당으로 당선됐으나 현재 무소속)이 출마를 강하게 권했다. 순천이 가족과 살기에 좋은 지역이기도 했다. 물론 지역주의가 완벽하게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 지역주의는 지역 발전 관점에서도 좋지 않다. 여야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역이라야 정부가 더 관심을 갖지 않나.
천 위원은 선거와 청년 비대위 활동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청년이지만, 선거와 정당 생활의 경험은 그를 ‘투사’로 변화시키는 듯했다. “청년이 무조건 옳고, 청년을 꽃가마 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에 쓴소리를 하니까 ‘○○○ 키즈’라고 해요. 이건 모든 정당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은 혼자 설 수 없고 앞에서 누가 끌어준다는 전제가 깔렸죠. 청년이 쓴소리하면 ‘키즈’라고 이름 붙이고 ‘너희는 우리랑 레벨이 다르다’며 마이너리그로 보내는 거예요. 청년정치를 폄하하는 거죠. 공천받은 후보자들 워크숍이나 세미나 한번 없었어요. 저같이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막막하죠. 당에서 홍보하라고 준 자료는 언론사가 아니라 보수 유튜버 목록이더라고요. 적극 출연하라고요….”
여야가 경쟁해야 지역도 발전
선거기간 중 ‘듣보잡 후보’ ‘투명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비정규직,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등 우리 사회의 ‘돈 없고 백 없는’ 이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고도 한다. “그분들의 설움에 비하면 제가 겪은 건 새 발의 피도 안 되죠. 그래도 선거하면서 보수가 따뜻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진보가 결과의 평등을 강하게 추구한다면 보수는 공정한 기회 보장을 강조하죠. 최소한의 자산·교육·건강 등이 없으면 공정한 기회라는 게 공허합니다. 따뜻한 마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는 보수 정치인은 괴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청년 비대위의 목소리가 통합당을 한번에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일단 앞으로 최소 4058시간(4058표) 이상의 시간을 순천을 위해 쓸 계획이다. “걸어서 순천을 한 바퀴 돌고 싶어요. 다음 선거에서 순천에 대해 토론할 때 주변을 압도할 수 있도록 순천 곳곳을 살필 겁니다. 고향은 대구지만, 누구보다 순천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다음을 향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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