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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2005 한국당의 꿈

‘한국당 대 나머지 4당’ 대립각 세우며 문재인 정권 타도 수위 높여 이번에도 이념 공세…

적극 지지층 모였지만 세 확산 갸우뚱
등록 2019-05-04 12:10 수정 2020-05-03 04:29
5월2일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4명과 지역위원장 1명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며 삭발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5월2일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4명과 지역위원장 1명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며 삭발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5월2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문재인 좌파독재정부의 의회민주주의 파괴 규탄 삭발식’은 비장했다. 5명의 삭발단은 머리를 매만지며 “독재정권 문재인 정권 규탄한다”는 구호로 팔뚝질을 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4월29일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핵심으로 한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등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에 올린 지 사흘 만이다.

“좌파” “독재” 한국당의 속내

같은 시각,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청와대 앞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이끌며 “좌파 경제 실험과 공포정치, 공작정치를 중단하라” “문재인 정권은 악법 패스트트랙을 철회하라”고 강도 높은 공세를 이어갔다. 나경원 원내대표도 패스트트랙 법안을 “좌파독재법”, 문재인 정권을 “독재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비판 수위를 높였다. 당 지도부 12명은 회의를 마치며 청와대를 향해 “독재 타도”를 외쳤다. 황 대표는 곧바로 서울역 광장에서부터 대전역 광장, 동대구역 광장, 부산 서면 영광도서 앞으로 이어지는 ‘문재인 스톱’ 집회를 주도했다. 이날 당 지도부가 쏟아낸 발언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단어는 ‘독재’였다. 정용기 한국당 정책위의장은 과 한 통화에서 “패스트트랙을 끝까지 밀어붙여 우리를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여당”이라며 “선거의 룰을 정하는 문제는 헌법과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현 정권에 엄중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연동형비례대표제 등) 패스트트랙만 태우면 당내 바른정당계뿐만 아니라 자유한국당도 냉각기를 거쳐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이라던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일까. 하루 전인 5월1일 여야 4당 원내대표가 “본회의에서 이대로 처리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회동을 제안했지만, 한국당 지도부의 대여 투쟁 수위는 정권 타도 구호와 함께 오히려 한 단계 높아지는 분위기다.

보수 표심을 노리는 ‘좌파’ ‘독재’의 외침은 4월27일 전국 253개 지역의 당협위원장이 총출동한 ‘제2차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당의 계속되는 이념 공세는 내년 선거에서 구도와 이슈를 선점하려는 포석으로 분명하게 읽혔다. 실제로 황교안 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는 이른바 ‘태극기 세력’과 화학적 결합을 꾀했고, 결과적으로 총선을 앞둔 보수야당이 적극적인 지지층을 자기 울타리 안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이는 최근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이뿐만 아니다.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하는 과정에서 한국당과 나머지 여야 4당이 정국을 양분하는 구도를 만들면서 사실상 ‘양당’ 구도로 선거에 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선거를 앞두고 진보·보수 진영별로 구심력이 작동하면 반문재인 정서를 토대로 한국당이 보수 진영의 중심에 서서 중도를 아우르는 보수 표심을 쓸어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 지도부가 4월26일 여야 4당의 합의로 시작된 패스트트랙 정국을 지렛대 삼아 이념 공세를 강화하고 대여 투쟁의 고삐를 당기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학)는 “적대적 양당 체제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략적인 발상이 아니고서는 해석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집토끼(기존 지지층) 쪽이 지리멸렬했으니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잔뜩 모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패스트트랙 지정을 두고 ‘의회 쿠데타’ ‘좌파 독재’ ‘사회주의(도래)’ 등으로 현 정국을 규정할 만한지에는 의문이 남는다.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한국당이 규정하려는 프레임이 과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패스트트랙 진행 과정을 보면 연동형비례대표제를 고리로 야 3당을 끌어들여 한국당을 고립시키고 향후 좌파연합을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도 편향됐다는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내부에서도 ‘이념 공세’에 답답함 호소

정 의장의 호언에도 당 내부에서는 지도부의 강경한 드라이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내년 총선에서 여권과 접전이 예상되는 수도권이나 중부, 일부 영남 지역 의원들은 속이 탄다.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현재 한국당이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게 여권이라고 해도 추경(추가경정예산) 등 민생 법안을 버리고 장기전으로 이념 공세를 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치다”며 답답해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동시에 새롭게 출범하는 더불어민주당 원내 지도부와 새롭게 협상할 수 있는 전략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준비 없이 무조건 패스트트랙 철회를 요구하며 좌파 공세를 하는 것을 유권자가 어떻게 볼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당 중진 의원들의 우려는 당 안팎에서 상당 부분 공명한다. 다만 현 상황을 패스트트랙 국면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해도 현재 리더십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해석이 더해진다. 당내 사정을 잘 아는 한 당직자는 “패스트트랙 국면에서 황 대표나 나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당이 조직적으로 뭉친 것은 지도부로서는 분명한 성과”라며 “이전 리더십에 의구심을 품던 당원들도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도부로서는 이런 기회를 당분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당이 과열된 상태에서 냉각기로 가려면 그만큼 장악력이 필요한데 현재 지도부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여권을 좌파로 규정해 투쟁 강도를 높이는 것이 단순히 정치적 유불리 계산을 넘어서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당 지도부가 최근 내놓은 메시지를 보면 과도한 측면이 많다. 다만 이전 말실수에서 비롯되는 망언, 망발과 차원이 다르다”며 “정부를 극단적인 언어로 좌파로 모는 것은 외부에서 혐오 대상을 설정하는 방법론과 다르지 않다.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좀더 면밀하게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당이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취합하고 나머지는 고려하지 않는 집단적인 확증편향에 빠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 그룹이 구사하는 파당적인 구호”라며 “현재 당 지도부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듯하다. 현재의 주장이 국민 일반에게 호소력을 가질지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박성민 대표는 “(지지층 결집과는 별개인) 보수야당의 공황 상태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보수야당이 분열한 뒤 이런 상황을 이끌 구심도, 오너십도 없는 상태에서 현재의 상황을 맞이했으니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공포심이 자극될 수밖에 없다. 잠재된 의식이 표출되는 것과 유사한 국면이다”라고 진단했다.

여야 당대표들이 참가한 5월1일 한국노총 행사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오른쪽 둘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겨레 김경호 기자

여야 당대표들이 참가한 5월1일 한국노총 행사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오른쪽 둘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겨레 김경호 기자

박근혜 없는 대여 투쟁 힘 받을까

야당 장외투쟁의 깃발은 올랐다. 당 지도부는 이번 투쟁을 1997년의 노동법 투쟁, 2005년 사학법 재개정 투쟁 등을 들어 승리를 장담한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주도했던 1997년 노동법 투쟁은 물론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재개정’이라는 전리품을 챙긴 2005년 투쟁과도 현 국면은 몇 가지 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윤평중 교수는 “당시 박 근혜 전 대표의 신산한 인생 역정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국민에게 주는 호소력이 있었다. 박 전 대표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한국당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여 투쟁을 길게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5년 당시 사학법은 종교단체, 사학재단 등 이해 당사자가 사활을 걸었다. 1997년 노동법 반대 정국에서도 정치권만 아니라 민주노총이 단단히 결집했다.

현재 극우보수 지지자를 중심으로 한 문재인 정권 반대 구호만으로 투쟁 동력을 장기간 유지하기에는 힘에 부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무엇보다 정략적으로 만들어진 극단의 구도가 결과적으로 한국당에 유리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박성민 대표는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통합진보당과 연대했고 당시 새누리당이 야권심판론을 들고나왔다. 결과적으로 여권을 향하는 심판론이 야당에 먹혀든 선거가 되면서 판이 뒤집혔다”며 “현재같이 이념 공세를 지속해 중도 표심을 잃으면 2020년 선거도 한국당을 향한 심판론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당이 전범으로 삼는 2005년 사학법 재개정 투쟁도 당시 박근혜 대표의 리더십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됐지만 중도확장성에 발목이 잡혔고, 결국 박 대표는 당내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한국당 해산 청원에 또 ‘북한 배후설’

중요한 것은 여론의 흐름이다. 민심의 물길 위에서 항해하는 정당 처지에선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보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한국당이 200만 명을 향해 가는 ‘한국당 해산 촉구’ 청와대 청원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나경원 대표는 5월1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당 해산 청원과 관련해 “북한 매체 가 4월18일 ‘한국당 해체만이 정답’이라고 말한 지 나흘 만에 정당 해산 청원이 올라왔다”고 언급한 데 이어,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배후에 북한이 있고, 북한 지령을 받는 세력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북한 배후설’을 제기했다. 나 대표는 4월3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청원이 민주주의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드루킹 여론 조작처럼) 청원의 조작 여부에 당연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의혹 수준의 색깔론과 조작설로 200만 명이라는 파도를 타 넘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청원 형식이 복수의 아이디로 참여할 수 있고,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범여권 지지자가 상당수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200만이라는 숫자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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