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76)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4년 전 새누리당에서 안팎의 장벽에 가로막히던 무렵, 오랜 지기인 남재희(82) 전 노동부 장관은 그에게 ‘명예 예편’을 권고한 적이 있다. 기고문에서 남 전 장관은 “이 기회에 김 박사가 구상하는 경제민주화의 전모를 국민들에게 모두 밝히고 지금 자리를 훌훌 떠나는 것이 보기에 후련할 것이다. 나머지는 국민이 선택할 몫”이라고 했다.
4년 뒤 김 대표는 정반대편인 더민주의 맨 앞에 서 있다. 남 전 장관은 대담집 (2010)에서 “(2007년) 대선에서 크게 지고 지금 진흙탕에 빠져 있다. 이게 그렇게 쉽게 극복되지 않을 거다. 정권을 잃고 정신 차리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린다”고 더민주의 앞날을 내다봤다.
그는 지금 김 대표의 행보와 더민주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3월23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식당에서 남 전 장관을 만났다. 같은 시각, 김 대표는 사퇴설을 물리치고 ‘당 잔류’를 선언했다. 김 대표와 남 전 장관의 인연은 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유학 경험이 바탕”김 대표와 1963년부터 친분을 쌓아왔다고 들었다.그때 난 민정(民政)당 출입기자였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이었는데, 몸이 불편해 최고위원회 회의를 밤낮으로 서울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했다. 김 대표가 사실상 혼자 할아버지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때부터 친해졌다.
김병로는 일제강점기 변호사로서 6·10 만세운동 등 항일운동 참가자에 대한 무료변론을 맡았고,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5·16 쿠데타 세력 중심의 여당에 맞서 1963년 76살의 나이로 범야 단일정당을 추구한 민정당(民政黨, 훗날의 민정당(民正黨)과 다르다)의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활동 시기도 겹친다. 김 대표는 어떤 국회의원이었나.김 대표와 민정(民正)당과 국회에서 같이 활동했다.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것이 김 대표의 경제관과 정치관의 바탕을 이룬 것 같다. 당시 서독 경제담당 장관을 했다가 총리까지 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이 김 대표가 주장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의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김 대표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뮌스터대학은 김수환 추기경이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송두율 교수가 철학을 강의한 대학이다. 김 대표는 저서 에서 에르하르트의 정책에 대해 “독일식 신자유주의로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정부가 해야 한다는 논리의 사회적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1959년 에르하르트가 주도한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보수 정당인 기독민주연합(CDU)은 단독집권에 성공했다.“민주노총에 그런 얘기 할 때 아냐”김 대표를 ‘지적 동료’ 또는 ‘경제이론의 멘토’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그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생각도 같고 이견이 별로 없다. 하지만 더민주 대표를 맡고 난 다음엔 이런 게 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대표가 ‘북한궤멸론’을 언급했는데, 북한이 아무리 실패한 체제라 하더라도 그 체제가 궤멸 또는 경착륙하면 북한 백성한테도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지만 남한 국민한테도 그 불똥이 튄다. 정치를 책임지는 입장에선 이걸 연착륙시켜서 쌍방의 희생을 줄이는 가운데 변화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김 대표가 ‘궤멸’이란 표현을 쓴 것은 거대 야당 대표로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관훈클럽 토론회가 끝난 뒤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김 대표에게 이건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언론을 통해 접한 바로는, 김 대표가 민주노총에 가서 사회문제에 집착하면 노동운동이 잘못된다는 얘기를 했다. 여러 얘기를 하는 중에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있고, 실제 사회문제에 너무 관심을 집중하다보면, 노동운동이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런데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돼 있고 정권이 민주노총을 핍박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에 가서 그런 얘기를 할 건 아니지 않은가.
김 대표는 2월9일 군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언젠가 북한 체제가 궤멸하고 통일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3월7일에는 민주노총을 방문해 “노사관계가 원활한 나라를 보면 노조의 기본적 목표는 근로자 권익 향상에 집중돼 있다. 기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선 간혹 관심을 둘 때도 있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근로자의 권익 보호는 소외된다”고 말했다. “필리버스터 중단, 비례 2번 문제 없다”정의당과의 협조 문제도 문재인 전 대표는 상당히 긍정적 반응을 보여왔는데, 김종인 대표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문제가 있다. ‘당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를 댔는데, 당 정체성이 같으면 합당할 일이다. (오히려) 당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에 협조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지난 대선 투표에서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당락이 결정됐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진영에선 정당 간 협조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제1야당이 제2, 제3 야당한테 무조건 협조하라고 할 순 없고, 총선에서부터 협조관계가 병행돼야 한다. 대선 때는 무슨 명분으로 협조를 구할지 궁금하다.
김 대표는 3월16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정의당과의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정체성이 다른 정당이 연대하는 것이 쉽게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더민주는 3월23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와 정진후 원내대표 지역구에도 후보자를 공천했다. 당 내외에선 김 대표의 필리버스터 중단과 비례대표 2번 ‘셀프공천’을 두고 비판이 거셌다.그 두 가지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필리버스터의 효과는 충분히 거뒀다고 생각한다. 당시 선거법 통과가 안 되면 선거를 못 치를 상황에서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고 본다.
당수가 2번에 셀프공천을 한 것도 이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진두지휘할 사람이 2번에 가면 상징적 효과가 있는 것이고, 예전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아슬아슬한 번호에 가서 득표율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둘 다 일리 있는 것이라 난 이의가 없다. 다만 전체 비례대표 공천이 잘됐냐는 건 별개의 문제다.
뭐가 문제라고 보나.친노와 운동권에 대한 일방적 공격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친노가 죄를 졌나? 친노를 죄인 취급하는 보수언론의 보도 태도부터 문제가 있다. 그런 태도가 상식화돼 야당이나 김 대표한테까지 암암리에 침투한 게 아닌가 싶다.
친노의 패권적 행태는 문제가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를 같이 한 게 왜 문제가 되나. 친노라고 무조건 매도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 운동권 출신이라고 매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운동권적 행태는 지금 시대에 안 맞지만 운동권 출신이란 점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을 한 게 왜 죄냐, 칭찬을 받아야지.
이런 것들이 혼동돼서 아무런 논리성도 없이 친노와 운동권을 배제하는 움직임이 이번 공천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수언론과 보수층이 만든 이상한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야권을 지배한 결과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더민주 중앙위원회의 항의가 있을 만했다. 오히려 대체적으로 김 대표가 잘못 짠 명단이 시정된 것이라고 본다.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 곤란”김 대표 영입부터 이번 공천까지 더민주의 ‘중도화’라고 볼 수 있을까.대선 전략이 아닌 정책적 중도화란 건 애매한 얘기다. 나는 우리 현실에 대담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대기업과 그 산하 기업들 말고는 중산층 이하들은 죽을 맛이다. 대담한 개혁이 필요한데 여기에 뜨뜻미지근한 중도 어쩌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겠단 말이다.
비례대표의 인적 구성에서 더민주가 전 공군참모총장을 넣은 건 안보 분야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지만, 수학교육과 교수를 1번에 놓은 건 어떤 이유와 정당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친노나 운동권들을 배제하고 가는 건 보수화나 중도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비례대표 명단엔 경제민주화가 잘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다만 똑같은 정강·정책을 갖고 있더라도 선거 때는 부동층과 중도층을 흡수하기 위해서 약간 탈선을 한다. 원칙적으로 이 나라엔 엄청난 개혁이 필요한 때지만, 선거 때 득표 전략상 약간의 중도화 컬러를 내세울 필요성은 정당들의 항시적인 이해였다. 어떤 게 본질이냐는 조금 더 선거가 진행되면서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김 대표의 최근 중도화적 발언들도 마찬가지다.
김 대표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신조가 야당의 정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김 대표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연구가 아주 깊다. 근래까지 매해 몇 달씩 독일에 가서 연구한다. 김 대표가 독일 모델에서 따오는 정책은 야당으로선 참고와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물론) 정책은 현실과 타협을 어느 정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우려처럼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로 가면 곤란하다. 너무 타협해서 경제민주화에 알맹이가 빠져버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두고 볼 문제다.
소수파로서 김종인을 말하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칼럼 ‘‘바닥을 향한 질주’를 되돌릴 수 있을까?’ ( 3월23일치)에서 김종인의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 ‘북한궤멸론’은 완전히 70년대 식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김 대표가 더민주에서 경제민주화 정책을 실제 구현할 수 있을까.김 대표가 예전 보건사회부 장관(1989년)과 청와대 경제수석(1990년)은 했지만 나라 경제를 거머쥐는 재무부 장관이나 경제부총리를 못했다. 보건사회부 장관은 경제 주무 장관이 아니고, 경제수석은 참모다. 아마도 경제관료의 주류가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유학 코스를 밟은 이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 대표는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런 점에서 소수파 중에 소수파다. 경제관료들이 관료주의가 유난히 강해서 그걸 휘어잡기가 어렵다.
반면 경제관료를 평생 한 이들을 보면 대개 재벌과 유착관계가 생긴다. 그런 점에서 김 대표는 재벌과의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다. 미국 유학파가 아니기 때문에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거다. 그런 비판적 인식과 안목의 차원에서 강점이 있다.
김 대표의 평생을 보면 독일적 체질에 익숙한 사람이어서 미국적 체질에 익숙한 사람보다는 그래도 경제민주화에 진실되고, 이른바 독일 모델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에 이른바 개런티(보증)가 되는 거다. 어느 사람이 갑자기 경제민주화나 복지사회를 떠드는 것보다 그의 평생 경력이 개런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새누리당이든 더민주든 집권당이 경제민주화 구상을 실현하려면 어떤 조건이 뒷받침돼야 하나.나는 앞으로 국민의 저항이 강화될 거라고 본다. 청년실업을 비롯해 빈곤과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문제에 대한 저항이 어떤 형태로든 삐져나오면 집권당이 어느 당이 됐든 그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민주화나 독일 모델로의 전환, 또는 버니 샌더스가 말하는 방향의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더민주가 집권한다면 김 대표가 역할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김 대표가, 득표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조금 보수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
김 대표 등 ‘합리적 보수 인사’가 야권의 간판이나 핵심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은 뭐라고 보나.이데올로기 붕괴부터 시작하는 얘기다. 야권 이론의 바탕이 전부 흔들리는 맥락이 있고, 그러다보니 건전한 보수들의 얘기를 흡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야권의 색깔 자체가 희미해졌다. 여야 통틀어 대재벌과 미국의 손바닥 위에서 게임하고 있으니까 비슷비슷해지는 거다. 대기업 이해관계에 거스르지 않고 미국에 불리한 소리를 점차 안 한다. 이슈가 별로 안 되는 시시한 문제로 싸운다. 결국 일반 서민들만 저리 동떨어져 있게 됐다.
진보정당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는데, 이유는 뭔가.더민주가 날고 뛰고 개혁한다고 해봐야 한계가 있다. 진보정당이 계속 문제를 제기해줘야 한다. 김 대표가 구상하는 독일 모델 경제민주화도, 독일의 기독민주연합만 있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사회민주당과 연립하니 메르켈 총리와 최저임금 협상이 가능한 것이다. 강력한 사민당과 좌파정당이 있으니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그런 모델이 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만 뚱딴지같이 경제민주화를 얘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패거리 싸움을 해야 한다”독일 사회민주당(SDU)은 대연정을 조건으로 집권당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독민주연합(CDU)에 최저임금 도입을 주장해 관철했다. 김 대표가 총선 이후에도 더민주를 이끌까.우선 총선까지로 본다. 총선이 끝나면 알 수 없는 것 같다. 총선까지는 가야 옳고 총선 이후 판도가 달라지니까 비대위 체제가 아닌 본격 체제로 탈바꿈하자는 얘기가 나올 거다. 더민주에 격변이 일어날 거다. 김 대표 체제는 그대로 못 간다. 더민주도 살아 있는 정당이라면 빌려온 리더가 아니라 자생적 리더의 형성 과정을 겪을 거 아닌가. 빌려온 리더로 만족한다면 그 당도 망하는 거다.
(그런데) 현재 야당 내에 김 대표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안 보인다. 총선이 끝나면 신진 리더들이 좀 나타나서 각축전을 벌여야 한다. 두세 명의 새로운 리더가 파벌도 만들고 각축전을 벌일 때 정당이 생명력 있고 발전한다. 문 전 대표가 대선 후보를 따놓은 당상이 아니다. 문 전 대표와 대권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그래야 문 전 대표도 강화되고, 국민의 관심도 집중되고, 정책도 개발된다. 정당이 원래 패거리 아닌가. 패거리 싸움을 해야 한다.
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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