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이상의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은 올해 9월부터 마드리드 시의원이나 시장에게 직접 질의하고,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법안이나 정책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는 선거에 당선된 1%의 정치인들만 행했던 일이다. 그 권한이 99%의 시민들에게 나눠졌다. 마드리드 정부가 시민참여 웹사이트 ‘마드리드 디사이드 (decide.madrid.es)를 열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가입 절차를 거치고 나면 누구나 정책 및 입법 제안(proposals) 페이지에서 정책과 입법을 제안할 수 있다. 마드리드 유권자의 2%에 해당하는 5만3726명의 동의를 얻은 제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지고, 과반의 동의를 얻으면 실제 정책이나 입법으로 이어진다.
시민에게 권력을 내준 ‘참여 웹사이트’
토론(debates) 페이지에서는 시민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제안하고 토론이 벌어진다. 지금 가장 활발하게 토론이 벌어지는 주제는 ‘국민투표에 부치는 최소 요건인 유권자 2%라는 동의 기준이 적절하냐’이다.
‘마드리드 디사이드’에 가입한 사람은 현재 6만여 명이다. 따라서 가입자의 90% 이상이 동의해야 ‘마드리드 디사이드’에서 제안된 정책이나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마드리드시는 이 토론에서 오간 의견을 바탕으로 ‘6개월에 한 차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제안에 대해서는 무조건 국민투표에 부치는 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내년 1월에는 ‘시민참여예산’ 페이지도 열린다. 마드리드시 예산 1억유로에 대한 예산안 사용처를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할 셈이다. 마드리드시 전체 예산 규모는 45억유로다.
흔히 빈말이 되기 쉬운 ‘참여’와 ‘소통’이 마드리드에서는 빈말이 아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다. 전세계가 공히 보유하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마드리드에서는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마드리드에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진 걸까. 그 답을 얻기 위해 마드리드 시의회 시민참여 디렉터 미겔 아라나 카타니아(33)를 12월9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났다. 미겔은 ‘마드리드 디사이드’ 웹사이트 설계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와글(온라인 기반 풀뿌리 정치 연구 벤처·대표 이진순)이 12월7일 연 ‘시빅테크(Civic-tech)로 혁신하다: 99% 민주주의’ 포럼에서 강연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마드리드 ‘99% 민주주의’ 실험의 시작은 권력 교체였다. 지난 5월24일 열린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마드리드 시장에 당선된 마누엘라 카르메나는 신생 정당 아호라 마드리드(Ahora Madrid·지금 마드리드)가 내놓은 후보였다. ‘아호라 마드리드’는 2015년 3월6일, 지방선거를 두 달 앞두고 꾸려진 시민-정당 연대체다.
퇴임 여성 판사인 마누엘라 카르메나는 인물 자체의 인지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호라 마드리드’의 온라인 예비선거에서 1등으로 뽑힌 후보라는 배경 하나만으로 전체 선거에서 20년간 마드리드 시장직을 맡아온 보수 국민당 후보를 제쳤다.
광장의 힘이 정권 교체로 이어진 배경이 권력 교체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아호라 마드리드’라는 시민-정당 연대체의 실체는 무엇일까.
연원은 4년 전인 2011년 5월15일에 열린 ‘15M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청년 실업률은 43.5%에 달했다. 1년 전 스페인 정부가 실업률을 낮추고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실시한 고용정책은 오히려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했고 일자리의 질을 낮췄다.
5월15일 지방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스페인 젊은이들이 ‘진짜 민주주의를 돌려달라’(Real Democracy Now)라는 구호를 들고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날부터 확산된 운동을 사람들은 5월(May) 15일을 뜻하는 ‘15M 운동’이라 불렀다.
운동 초창기부터 적극 참여한 미겔의 설명에 따르면, 15M 운동은 특별했다. 이들의 구호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추상적이기 그지없었다. ‘진짜 민주주의를 돌려달라’니. 급진적이기도 했다. “기성 정당 어느 곳도, 기성 정치인 누구도 우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주장은 현재의 시스템을 완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추상적이었지만 완벽하게 열려 있었다. 광장 여기저기서 ‘총회’(assembly)가 열렸다. ‘환경 총회’ ‘국제 연대 총회’ 등 주제도 다양했다. 누구나 광장으로 걸어 들어와 원하는 무리에 앉으면 참여할 수 있었다. 기자들은 물었다. ‘누가 리더야?’ ‘누가 조직한 거야?’ ‘원하는 게 뭐야?’ 미겔은 말했다. “정말로, 진실로, 아무도 조직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들고나온 진짜 민주주의를 돌려달라는 구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이 설명은 기존 프레임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5월15일 하루에만 스페인 58개 도시에서 벌어진 젊은이들의 시위에 대해 스페인의 기성 언론은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15M 운동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채널인 웹사이트(http://tomalaplaza.net)를 만들었다. 이 웹사이트는 15M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열린 총회에서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올렸다.
15M 운동의 대변인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순환보직’이었다. “한 명이 이야기할 경우 그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어요. 또 그 사람의 ‘의견’과 운동의 실체가 섞일 수밖에 없어요.” 이 때문에 돌아가면서 대변인을 맡았고, 대변인은 ‘전체 의사를 전달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진짜 민주주의’라는 15M 운동의 구호는 그대로 ‘아호라 마드리드’라는 시민-정당 연대체로 계승됐다.
15M 운동은 하나의 디딤돌과 하나의 벽에 마주치며 ‘아호라 마드리드’라는 연대체로 이어진다. 디딤돌은 강제퇴거 저지 운동 등과 결합하며 얻은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이다. 2011년 스페인 전역에서는 경기 악화, 잦은 실업 등으로 하루에 300가구가 살던 집에서 내몰리는 강제퇴거를 겪고 있었다. 15M 운동은 물밑에서 벌어졌던 이 ‘강제퇴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미 있던 주거권 운동단체인 파(PAH)와 광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강제퇴거 저지 활동’에 함께할 수 있게 했다. 이를 위해 ‘우사히디’(USAHIDI)라는 인터랙티브 지도를 제공하는 무료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했다. 앱을 설치하면 강제퇴거가 일어나는 지역을 알려준다. 앱을 통해 강제퇴거 지역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도울 수 있다.
강제퇴거 저지에 참여한 뒤 인증샷을 찍어 올릴 정도로 강제퇴거 저지 연대는 유행처럼 번졌다. 이는 “작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다’라는 믿음을 일깨워준 승리하는 경험”이 됐다.
이후 3년여 동안 공교육 지출 삭감에 반대하는 ‘그린 웨이브’, 간호사·의사 등이 의료 민영화에 반대하는 ‘화이트 웨이브’는 등 구체적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린 웨이브’ 공교육 지출 삭감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화이트 웨이브’는 의료 민영화를 막아냈다.
‘디지털 온리’를 넘어그러나 15M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크고 작은 활동에 정치권은 무관심했다. 15M 운동이 부딪힌 벽이다. “정말 존경심이 생길 정도로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2015년 지방선거가 가까워졌다. 광장을 겪은 사람들은 ‘정치운동’을 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여러 운동을 펼쳤지만 정치권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정치를 해보자’라는 생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정당’이나 ‘권력’이 목적이 아니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 ‘권력’을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지역의 여러 풀뿌리 모임들과 온라인 기반 신생 좌파 정당인 ‘포데모스’가 느슨하게 결합한 ‘아호라 마드리드’가 만들어졌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2015년 3월6일이었다. 그리고 ‘아호라 마드리드’가 내놓은 후보가 시장에 당선됐다. 시의회 선거에서도 ‘아호라 마드리드’가 31.85%를 얻어 의석 57석 가운데 20석을 차지했다.
‘아호라 마드리드’를 이끈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좌우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다. 우리는 좌파에서, 우파에서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래(bottom)에서 왔다. 맨 위에 있는 사람에게 대항하는 맨 아래의 사람들이 뭉쳤다.
2. 우리가 하는 게 진짜 정치다. 정치인, 의회가 그동안 해온 방식은 진짜 정치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 세상에 대해서 토론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듣는 게 정치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정치를 하겠다.
3. 이해하기 쉬운 말을 쓴다. 언어가 참여하는 데 진입장벽이 되지 않도록 전문가들이 쓰는 어려운 단어는 최대한 배제한다.
‘아호라 마드리드’는 이 3대 원칙에 따라 아래에 있는 99%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한 온라인 투표 플랫폼을 만들었다. 이 투표 플랫폼에서 1만5천 명이 참여해 시장 후보는 물론 시의원 후보자의 비례대표 번호도 결정했다. 선거 공약 역시 여기서 논의해 결정했다.
‘아호라 마드리드’ 플랫폼에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알고리즘이 적용됐다. 예를 들어 공약을 결정할 때 단순히 투표 시스템만 적용하지 않았다. ‘좋은 의견을 고르는 일’과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일’을 결합하기 위해, 제안된 의견을 ‘합의 정도’ ‘논쟁 정도’ 등으로 나눠 순위를 매겼다. 그에 의거해 1~200번 공약을 순서대로 매긴 뒤 오프라인 ‘워킹그룹’을 만들어 해당 주제에 대한 세부 정책을 만들었다. 그 뒤 최종적으로 투표 시스템을 가동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해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이다.
만약 스페인의 이런 시스템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얼마나 참여할까. 미겔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플랫폼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참여자 수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1:9:90의 원칙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아호라 마드리드’에서 공약을 결정하고 후보자를 뽑는 예비선거에 참여한 사람은 1만5천 명이다. 마드리드 인구(320만 명)의 0.5%에 불과하다. 미겔은 1:9:90 원칙을 말했다. “1%가 아주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만든다. 9%는 소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90%는 수수방관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1%의 사람과 소극적으로나마 참여하는 9%가 합해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미겔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강조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변화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와 사라고사의 시민들이 특별히 용감해서, 특별히 정치의식이 탁월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는 로마의 흥망성쇠 다큐멘터리를 보듯 타자화하면서, 스페인의 사례를 보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한국의 시민들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말하고 싶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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