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3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이완구 국무총리가 지난 4월20일 밤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흔들림 없이 국정을 수행하겠다”던 이 총리가 전격적으로 사퇴를 결심하게 된 것에는 새누리당 지도부의 자진 사퇴 압박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이 총리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나선 새정치민주연합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양새가 되느니 차라리 여당이 먼저 나서 이 총리의 사퇴를 주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새누리당이 이 총리를 버리고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많다. 일단 신임 국무총리를 여당의 손으로 직접 처단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새누리당이 자정작용이 가능한 당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과 동시에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한 친박 핵심 인물들과 새누리당 지도부를 분리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미 새누리당 지도부가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 비박계 인물들로 꾸려진 점도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주효하게 작용한다. 또한 이들은 이 총리의 사퇴 표명으로 ‘성완종 리스트’ 사태의 1단계를 마무리하는 효과도 함께 얻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새누리당 지도부는 이번 4·29 재보선에서 패배하더라도 그 책임에서 훨씬 자유로워지게 됐다. 윤태곤 ‘의제와 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재보선에 국한해서 보자면 이번 선거가 잘못된다고 해서 새누리당 지도부를 욕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지도부가 사태를 수습하고 뛰어다니면서 이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얘기될 것이다. 결과가 아주 좋지 않을 경우에도 청와대가 무능해서 그런 것이라는 평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새누리당 지도부의 전략은 가능한 한 이번 사태를 빨리 털어내고 쇄신의 모습을 보이면서 다음 총선을 준비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총리의 사퇴 압박과 함께 새누리당 스스로 특검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내년 총선이 다가오기 전에 가능하면 빨리 악재를 털어내자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새누리당의 핵심 당직자는 “새누리당이 특검 얘기를 꺼낸 것은 이번 사건을 빨리 털어내고 싶어서다. 정말 문제가 되는 사람을 빨리 정리하고 최단기간 안에 끝내자는 취지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일부에서 펼치고 있는 “2012년 불법 대선자금 의혹과 관련해 야당도 함께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물귀신 작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불법 대선자금 논란을 확장시킬 경우 이번 사태의 파장이 총선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전략은 ‘빨리 털어내고 가자’는 전략과는 여러모로 배치된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략이 서로 엇갈리는 게 아니다. 지금 새누리당으로서는 이완구 총리나 홍준표 경남도지사 선에서 끊고 싶은 건 모두 한마음이다. 1차적 목표는 그것이지만 뜻하지 않게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까지 확대돼 탈탈 털리는 상황이 될 경우에는 야당도 같이 가야 한다는 거다. 새누리당의 목표는 과거 ‘차떼기’처럼 우리만 나쁘다고 손가락질당하는 게 아니라 ‘여야 모두 나쁘다’고 정치권을 싸잡아서 욕하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닥까지 같이 떨어지자는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는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 있다.”
새누리당의 이런 자신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지금까지 새누리당이 당에 몰아닥친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2003년 차떼기 사건으로 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불법 대선자금 연루자들을 쳐낸 뒤 도덕적으로 깨끗한 이미지의 박근혜 대통령을 내세워 머리를 조아렸다. 이런 쇄신의 이미지를 통해 한나라당은 의석수 121석을 확보하며 살아날 수 있었다. 2011년 말 최구식 당시 한나라당 의원 비서가 연루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 사태에서도 당은 최 의원을 재빠르게 탈당시키고 박근혜 대통령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비대위원으로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신선한 외부 인물을 영입하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혁신의 이미지를 내세워 2012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렇듯 새누리당에는 악재를 기회로 활용하는 비상한 ‘기사회생’의 능력이 있다. 여권 관계자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는 본능이 작용한다. 위기가 왔을 때 일단 당이 살아야지 나에게도 살 기회가 온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개인이나 계파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위기가 닥쳤을 때 친박이든 비박이든 쇄신파든 모든 계파가 하나로 뭉친다. 생존 본능이 뛰어난 것이다. 반면 야당은 당이 어떻게 됐든 계파와 개인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게 야당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 극복이 결과적으로는 썩은 몸통은 그대로 놔둔 채 껍데기만 바꾸는 식의 ‘위장술’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문제점을 제대로 개선하지 못한 채 꼬리만 잘라내고 ‘이미지 쇄신’에 주력했던 과거는 결국 동일한 방식의 위기를 반복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부메랑으로 다가왔다. 2003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차떼기’로 불거진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자 했다면, 12년이 지난 2015년에 같은 사건으로 정권이 최대 위기를 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016년 총선을 1년 앞두고 있는 현재 새누리당의 위기 극복 방식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의 핵심인 이완구 총리를 쳐낸 것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완종 리스트’ 사태가 마무리되면 유승민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서서히 박근혜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담론을 주도하는 등 달라진 새누리당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누리당의 몸통은 과연 얼마나 변화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유승민 체제’와 ‘박근혜 체제’의 차이점을 들어 이번 쇄신은 단순한 ‘위장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소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지’에 편승한 측면이 큰 반면, 이번 사태를 극복하는 역할을 맡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경우 정치적 소신이 일관되고 뚜렷하다는 점이 그 근거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앞으로 유승민 원내대표를 필두로 한 당내 개혁파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당내 권력의 역학관계를 극복하는 등 치열한 당내 싸움을 벌이며 실질적인 개혁의 파고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도려내겠다?그러나 ‘성완종 리스트’에 대처하는 유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이들이 썩은 몸통을 도려낼 의지를 가졌는지 의심스럽다.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쳐낼 의지가 있다면 이번 사태가 불법 대선자금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거나 야당을 물고 늘어지는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국민 앞에 모든 잘못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를 완전히 털고 가는 전략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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