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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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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대 북-일, 긴박한 편가르기 열흘

6월 말~7월 초 각국 주요 회담 결과 견제하며 눈치작전… 한-중 회담 결과 발표에

정작 일본 얘기는 쏙 빼더니 중국이 공조 강조하자 청와대 그제야 일본 문제 토의 시인
등록 2014-07-08 15:25 수정 2020-05-03 04:27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7월1일 도쿄 총리 관저의 회견장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각의 결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AP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7월1일 도쿄 총리 관저의 회견장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각의 결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AP

한-중 대 북-일, 또는 한국 대 북한, 또는 중국 대 일본. 어느덧 진영이 이렇게 정리돼버리는 걸 보면, 7월 초 양쪽은 치열하게 맞붙었던 모양이다. 6월 말~7월 초에 걸친 이 열흘을 되짚어보니, 서로의 회담 결과를 견제하려는 각종 ‘작전’의 흔적도 엿보이는 것 같다.

지난 6월25일 북한과 일본은 7월1일 중국 베이징에서 2차 국장급 회담을 연다고 발표했다. 이틀 뒤인 6월27일 한국과 중국은 7월3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북-일 2차 회담도, 시 주석의 방한도 한참 전부터 예고된 행사였다. 남은 건 누가 먼저 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1일과 3일, 일단 날짜가 정해졌다.

<font size="3">북-일 회담일, 일본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선언</font>

북-일 회담 하루 전인 6월30일, 일본 쪽에서 ‘회담은 7월1일에 하지만, 결과 발표는 7월3일에나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회담 자체가 1일 저녁에나 끝나는데다, 2일엔 아베 신조 총리가 지역(이와테현) 출장이 예정됐다는 것이다.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발표하려면 총리의 각료회의 보고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7월3일은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된 날이었다. 곧, 한-중 회담 발표문과 북-일 회담 발표문이 같은 날에 나온다는 얘기였다. 양쪽의 발표 수위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느 쪽이 먼저 발표하는지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 의도는 없었을까? 이날 ‘같은 날 발표’ 소식을 들은 한 국내 외교안보 전문가는 “북한과 일본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나보다! 이젠 동북아에서 한국, 북한, 중국, 일본이 미국 빼놓고 자기들끼리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7월1일 북한과 일본의 대표단은 베이징에서 만나 첫 장면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미사일 발사를 둘러싼 설전을 벌이며 맞붙었다. 일본 쪽은 북한의 6월29일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 안보리 결의, 일-조(북-일) 해양선언, 6자회담 원칙에 위배되며,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북한 쪽은 “우리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이번 발사체 발사는 비행, 안전수칙 등을 지켰다”고 반박했다.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로워 보였다. 저녁 6시30분께 회담이 끝난 뒤 일본 대표단은 기자들에게 ‘알려줄 만한 게 없다’고 했고, 북한 쪽도 마찬가지였다. 회담 결과는 베일에 가려졌다.

여기서 양쪽은 한 박자를 쉬었다. 회담 결과에 대한 관심은 그 이상 증폭되지 않았다. 그날은 북-일 회담이 동북아 외교안보 ‘최대 이벤트’일 수 없었다. 집단적 자위권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 일본 정부는 이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헌법 해석 변경안을 공식 채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전쟁을 벌일 수 없는 나라’를 선언했던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꾼다는 의미였기에 주변국의 우려는 컸다.

집단적 자위권 보유 선언에 대한 비판은 일본 내부에서도 확산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언론에선 북-일 회담의 성과에 대한 보도가 조심스레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정부 관계자는 <nhk> 인터뷰에서 “북한으로부터 진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질문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북한이 제대로 답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각의 개최와 공식 발표가 관건이 됐다.

<font size="3">한국이 너무 미국 눈치를 본다? </font>

북한과 일본은 예상대로 7월3일 공식 발표를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오전 11시께 기자회견에서 북한 쪽이 납치 문제 재조사에 대해 ‘이례적인 성의를 보였다’고 말했다. “국가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조직이 전면에 나서 전례 없는 태세가 생겼다고 판단된다.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일본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일부 조치를 해제하고자 한다.” 일본은 북한에 대해 △인적 왕래 규제 △대북 송금 보고 의무화 △선박 입항 금지 조처를 해제했다.
이날 오후 2시 시진핑 주석이 한국에 도착했다. 4시30분께 한-중 정상회담이 시작됐다. 두 정상은 1시간30분 정도 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에 나섰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하는 등 결과가 발표됐는데, 예상했던 일본 얘기가 없었다. 역사 문제에서 퇴행하고 재무장 시도로 안보 불안을 불러온다고 양국이 입맞춰 비난해온 터였다. 두 나라가 역사를 매개로 한 공조에 나설지에 관심이 모아졌지만, 공동성명에도, 기자회견문에도 ‘일본’ 또는 ‘역사’란 단어조차 없었다. ‘한국이 너무 미국 눈치를 본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날 저녁 중국 쪽에서 딴말이 나왔다. 한창 환영만찬이 벌어지던 시각, 뉴스에선 공동선언·기자회견에서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 보도됐다. “시진핑 주석은 아래 몇몇 방면에 대해 한-중 양국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내년은 세계 반파시즘전쟁(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이자,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및 조선반도(한반도) 광복 70주년이므로, 쌍방은 기념행사를 할 수 있다.”
시 주석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일본을 겨냥해 ‘한-중 공조’를 제안했다는 내용이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 입장도 발표하지 못하는 사이, 시진핑 주석은 다음날(7월4일) 오전 10시40분부터 시작한 서울대 강연에서 주장의 강도를 한층 높였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는 양국 백성들이 공동의 적에 대해 함께 적개심을 불태우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장에 나아갔다.(同仇敵愾 竝肩作戰)” 그때처럼 또다시 일본에 맞서 싸우자는 얘기로 들렸다.
시 주석의 강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상반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중·한에 대한 야만적 침략전쟁을 강행해, 한반도를 병탄하고 중국 국토의 절반을 강점해 양국이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나 상하이 윤봉길 의사 기념관, 시안의 광복군 기념비는 잊지 못할 (이런)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 정도면 ‘한-중 공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한국 정부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시 주석의 강연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낮 12시17분, 이번엔 북한에서 일본 납치피해자 문제를 다룰 특별조사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전날 일본 쪽 공개본과 같은 내용이었지만, 한글로 적힌 이름과 직함 덕에 훨씬 정보는 분명해졌다. 권력 실세로 평가되는 국가안전보위부의 핵심 간부가 포함된 명단은 분명 무게감이 있었다.

<font size="3">오후 5시께야 태도 바꿔</font>

청와대는 시 주석의 방한 일정 거개가 마무리된 오후 5시께 태도를 바꿨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사실은 어제와 오늘에 걸쳐 일본 문제에 대해 많은 토의가 있었다”며, △고노 담화 검증에 대해 유감을 공유하고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해 공감을 했으며 △북-일 대화가 북핵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그 시각에 이르러서야 역사를 고리로 중국과 손잡고 일본을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종전 70주년 행사’도 합의는 하지 않았지만, 시 주석의 설명을 들은 건 시인했다. 이런 사실을 왜 이 시각까지 꽁꽁 감춰야 했는지에 대해, 시 주석은 “어제는 그것에 대해 저희가 답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시 주석은 이날 저녁 중국으로 돌아갔다.

김외현 정치부 기자 oscar@hani.co.kr</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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