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해.”
지난 4월3일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던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새정치연합) 공동대표에게 소리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약속했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공약을 폐기한 것과 관련해 안 대표가 “왜 대선 공약 폐기를 여당의 원내대표께서 (박근혜 대통령) 대신 사과하시는지요?”라고 말한 직후 튀어나온 말이다. 막말 논란이 거세지자 최 원내대표는 4월4일 이 말에 대해 사과했지만, 사실 “너나 잘하라”는 말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린 친박 핵심 의원의 충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 대통령은 2012년 11월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정치쇄신안을 발표하며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각오로 국민의 행복을 가로막는 어떤 것과도 단호히 맞서겠다. 기초자치단체의 장과 의원의 정당공천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년6개월 뒤 박 대통령은 ‘불퇴전의 각오’를 저버리고 공약을 폐기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그런데 지난 3월30일 안 대표가 공약 폐기와 관련해 박 대통령과 대화를 하자고 제안하고 4월4일 직접 청와대를 찾아가기까지 했으니 박 대통령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러나 아마도 침묵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야당이 아무리 압박한다고 한들 박 대통령이 6·4 지방선거 전에 사과를 하거나 대선 공약을 다시 지키겠다고 나설 확률은 거의 없다.
공약 파기로 박 대통령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엄청나다. 당장 이번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승리가 현실화하고 있다. 지방선거의 승리는 국회와 정부, 그리고 지방정부까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안정적인 집권 기반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에게 절실한 과제다. 집권 1년을 넘겼는데 이뤄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비판에서 벗어나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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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의 공약 파기 움직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7월 새누리당은 기초공천 논의를 위해 당헌·당규 개정특위를 구성했다. 그리고 6개월 뒤인 지난 1월5일 아예 기초의회를 없애는 내용의 ‘지방자치제도 개선안’을 내놨다.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광역의회가 기초단체까지 견제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기초의원 공천을 안 하겠다”는 대선 공약의 의미도 자연히 사라진다. 이 방안이 나오자 야당은 공약을 사실상 폐기하려는 꼼수라며 반발했다.
개정안이 먹혀들지 않자 새누리당은 1월22일 기초공천 여부를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일임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당론으로는 공약을 폐기하고 기초선거 공천을 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이재오 의원 등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이 “약속한 대로 기초공천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기초공천을 유지해야 한다’는 새누리당 특위 위원들과 ‘약속대로 기초공천을 폐지해야 한다’는 야당 특위 위원들의 주장이 엇갈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났다. 이때부터 새누리당은 본격적으로 자기 길을 가기 시작했다. 2월25일 새누리당은 상임전국위원회를 열어 ‘상향식 공천’을 원칙으로 하는 내용의 당헌·당규 개정안을 가결했다.
4월4일 청와대를 찾아가 박준우 정무수석과 면담하고 돌아온 안 대표는 4월7일까지 답을 줄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으로부터 답이 올까? “(대통령은) 응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지금 지지율도 (높게) 나오는데 굳이 여기에 발 담가서 선거판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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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왼쪽)이 지난 3월18일 화상 국무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오른쪽)가 지난 4월4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 면회실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류우종
어림없을 것이다.
‘여당도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을 지키라’는 안철수 새정치연합 공동대표는 타석에 올라 야구 배트를 크게 휘두르고 싶겠지만, 투수(박근혜 대통령)는 아예 공을 던져주지도 않고 딴청을 피울 것이다. 야당 대표에게 대꾸하지 않는 청와대의 ‘무시 정치’는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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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민주당 대표로 취임한 김한길 대표는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제 도입, 국가정보원장·법무부 장관 등 해임, 사회 갈등 해소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했지만, 이런 제안은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 어딘가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안 대표가 지난 3월30일 박 대통령에게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등 정국 현안을 논의하는 회담을 제안했지만, 당에서도 여권의 전향적 변화를 크게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안 대표 쪽 핵심 인사는 “여당이 무공천으로 돌아서겠나.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약속 이행이 새정치의 중요 덕목이라면, 새정치 실현을 주장하는 안 대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권에 더 강하게 대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새정치연합 쪽 핵심 당직자는 “그게 딜레마”라고 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문제를 극대화하면 다른 이슈가 묻힌다. 정당공천 문제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적다. (공천 해법에 당내 이견이 있는 등) 정당공천 이슈가 당내 갈등·분열 이슈로 외부에 비치기 때문에, 이 이슈를 키우는 것도 부담이다.”
진영 간 극한 대립을 정치 해악 요소로 보는 안 대표의 성향상 정당공천 문제를 들고 장외투쟁에 나설 것 같지 않다. 안 대표는 지난 3월30일 서울역에서 기초공천 폐지 범국민서명운동을 홍보하며 ‘오프라인’으로 나가는 듯했지만, 4월1일엔 바로 당 대표실에서 ‘온라인’ 서명운동 발대식을 열었다.
여당이 끝내 안면몰수하면, 안 대표는 부당한 게임의 룰을 바로잡는 차선으로 “우리도 공천합시다”라고 태도를 바꿀까? 안 대표 쪽의 다른 인사는 “그럴 리가”라며 가능성을 잘랐다. 안 대표가 어쨌든 기초공천 폐지를 민주당과의 통합 명분으로 내걸어서다. 3월2일 통합 선언 당시 발표문에 “신당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약속을 이행하고…”라고 못박은 것이, 안 대표와 새정치연합의 유연한 결정에 큰 걸림돌이다. 당내에선 전 당원 투표를 통해 정당공천 문제를 종결짓자거나, 인구 10만 명 미만의 기초자치단체부터 무공천을 하자는 의견 등이 나오지만, 안 대표가 수용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아 보인다.
새정치연합의 다른 당직자는 “우리 당의 광역단체장 후보 경선이 4월10일께부터 시작되니, 그 전에 정당공천 문제를 매듭짓고 민생·정책 이슈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쪽만 기초선거 무공천’의 고통을 감내하고, 더 큰 승부인 광역단체장 선거에 집중하자는 뜻이지만, 아우성치는 기초선거 현장의 혼란이 쉽게 정리되진 않을 듯하다.
(덧붙이자면, 안 대표의 선택에 대한 기자의 이런저런 생각은 크게 엇나갈 수도 있다. 새정치연합 관계자의 얘기 한 토막. “안철수를 잘 모르겠다. 서울시장 후보 양보, 대선 단일후보 양보, 독자 창당을 하겠다더니 민주당과 통합. 이 3건을 보면서 안철수가 기존 정치문법을 허무는 또 어떤 창조적 파괴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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