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
스무 살 풋풋한 여대생 서연은 우연히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게 된 승민과 그들만의 설익은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15년이 흐른 뒤 건축가 승민 앞에 불현듯 다시 찾아온 서연에겐, 승민과 함께 노닐던 강북 어느 오래된 동네 어귀가 마음에 생채기를 입힌 지난 세월의 더께를 잠시나마 씻어내줄 치유의 공간이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20대 중반의 ‘영애’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고독한(!) 독재자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게 해준 남쪽 끝 어느 섬에서의 시간이 강력한 ‘원체험’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은 그 시절의 영애는, 아버지와 거닐었던 바닷가 모래사장에 다섯 글자를 남긴다. ‘저도의 추억’.
크고 작은 일들이 영애의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취임 이후 잇따른 인사 파행, 눈치만 보는 공무원들의 작태… 무엇보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의 진상 규명과 남재준 국정원장의 사퇴, 국정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져만 간다. 그의 마음이 지쳐갈 때 그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기억도 다시금 또렷해졌다. “35여 년 지난 오랜 세월 속에 늘 저도의 추억이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는데, 부모님과 함께했던 추억의 이곳에 오게 되어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추억으로 치유(!)받은 그는 세상을 향해 ‘답변’을 내놨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에 소개된 ‘한홍구-서해성 대담’에서 나온 표현처럼, 김기춘이란 이름 석 자는 단연코 유신의 ‘아이돌’이다. 악명 높은 유신헌법의 초안을 몸소 다듬었고, 공작선거의 화신이라 할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이자,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선 그의 이력은 곧 공안통치와 지역감정 조장, 관권선거 등 얼룩진 우리 현대사와 그 자체로 싱크로율 100%다. 청와대가 인선 배경으로 언급한 “탁월한 경륜과 역량” “종합적인 균형감각”이라는 표현은 허탈함을 넘어 우리말에 대한 최고 수준의 모독이다.
현실의 서연은 결코 추억에 무너지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의 삶이란 미리 정해진 정교한 설계도와는 거리가 먼, ‘개론’이자 ‘습작’에 가까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의 대통령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길어올린 유신의 악령은 우리 모두의 삶에 곧 재앙일 뿐이다. 통속적인 표현일진 몰라도, 추억이란 그저 아련함으로만 남아야 한다. 추억이 곧 잔혹함으로 변하는 순간, 모래 위에 써내려간 저도의 추억이란 다섯 글자는 국민의 가슴속에 유신의 악령으로 또렷하게 박힐 뿐임을 ‘유신공주와 일곱 어르신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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