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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에 추첨제 더한 ‘녹색당+’

등록 2013-03-03 15:46 수정 2020-05-03 04:27

지난해 4·11 총선을 앞두고 공식 창당한 녹색당의 득표율은 0.48%에 그쳤다. 10만3811표다. 현행 정당법은 총선에서 2%의 득표율을 넘지 못한 정당의 등록을 취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을 닫아야 했다. 녹색당이라는 당명을 더는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진보신당·청년당 등과 함께 현행 정당법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을 했고, 당원들이 릴레이 1인시위를 벌였다. 당명을 되찾으려는 활동이었다. 대선 과정에선 탈핵의 문제의식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해 여야 각 후보들에게 전달했다.

정당 해산과 재창당이라는 성장통을 겪은 녹색당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난 1월19일 서울 용산구 철도회관에서 열린 ‘녹색당 풀뿌리 정치 워크숍’에 참석한 녹색당 당원들이 “녹색당에 투표하겠다”는 의미로 초록색 유인물을 들고 있다. 한겨레 최우리 기자

정당 해산과 재창당이라는 성장통을 겪은 녹색당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난 1월19일 서울 용산구 철도회관에서 열린 ‘녹색당 풀뿌리 정치 워크숍’에 참석한 녹색당 당원들이 “녹색당에 투표하겠다”는 의미로 초록색 유인물을 들고 있다. 한겨레 최우리 기자

10만3811명, 희망의 근거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원전에 대한 공포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그해 서울 시내에서 열린 탈핵 집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야권을 중심으로 탈핵의 문제의식이 비로소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원전을 확대하지 않겠다”거나 “노후 원전의 가동 기한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공약이 등장했다.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는 선거 기간 중 탈핵 관련 행사에 참석해 “원자력에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맡기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선에선 마지막까지 ‘탈핵’을 언급하지 않은 후보가 승리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2월14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과학 분과 국정과제 토론회에서 “한국의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믿음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원전 전문가인 민병주 의원을 공천한 이도 박 당선인이었다. 새 정부의 길도 원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녹색성장’이라고 포장해 밀어붙인 이명박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실험이 여전히 진행형인 것은 어쩌면 숙명인지 모른다. 정당 해산이라는 아픔 속에서도 이들은 지난해 10월13일 ‘녹색당+’라는 명칭으로 재창당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탈핵·탈토건·농업·생명·평화·인권의 가치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10만3811명이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날이 녹색당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점”이라고 했다.

녹색당은 기존 진보정당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노동자나 농민 같은 전통적 의미의 ‘주력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녹색당은 지향하는 가치에 동의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이면서도 매우 느슨한 연대체에 가깝다. 우선 당 대표가 없다. 통상 정당을 이끄는 ‘지도부’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는다. 공동운영위원장과 공동정책위의장이 대표단의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 각 지역의 풀뿌리네트워크가 결합돼 있다. 기초의회에서 녹색당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김수민 구미시의원과 서형원 과천시의원도 소중한 자산이다. 7천여 명의 당원 중 당비를 내는 당원은 5천 명 수준이라고 한다.

창당과 정당 해산, 재창당의 숨가쁜 과정을 거쳤지만 당장 내년 지방선거 준비에 돌입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 총선에서 녹색당의 비례대표 1번 후보였던 이유진 공동정책위원장은 “아직 당 차원에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전국에 후보를 내는 방식은 아닐것”이라며 “녹색당의 후보가 당선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 지역에서 올바른 가치를 바탕으로 활동할 수 있는 좋은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추첨제 민주주의’는 혁명이다

3월16일로 예정된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녹색당은 대의원 전원을 추첨제로 뽑는, 세계 정당 사상 전례가 없는 실험도 진행하고 있다. 녹색당과 마찬가지로 총선 이후 해산된 진보신당도 대의원 추첨제를 일부 시행했지만 그 비율은 10%에 그쳤다. 녹색당은 100%다. 기성 정당 내부의 권력 다툼 속에서 특정 지역과 직군, 정파가 과대표되는 부작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물론 내부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우선 추첨제 대의원이라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지부터 미지수였다. 그렇게 뽑힌 대의원들의 대표성과 참여의 적극성도 논란거리였다. 하지만 녹색당은 끝내 이 제도를 관철했다.

이미 전국 16개 지역에서 당원들을 대상으로 대의원을 추첨하고 개별적으로 수락의사를 묻는 작업이 시작됐다. 지역·성별·연령대의 비율에 따라 대의원을 추첨하고 이 과정에서 장애인·성소수자·이주민·청소년 등이 일정한 비율로 포함되도록 했다. 대의원 전면 추첨제는 이들의 바람대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추첨제도입을 주도한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소 교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입법부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편다. 그는 지난 1월 열린 한 토론회에서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 학습은 시민이 직접 의사결정의 주인으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단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로만 남아 있게 되면 신뢰와 참여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작은 씨앗입니다”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녹색당이지만, 진보정당들이 지난 총선 이후 몰락의 늪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안타깝다고 했다. 이유진 정책위원장은 “한때 제3당으로까지 부상했던 진보정당의 급격한 추락에는 여러 평가의 측면이 있겠지만 결국 정당의 바닥을 탄탄하게 다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이렇게 말했다. “녹색당이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에요. 가치와 비전에 공감하는 동시에 실현 가능성을 두고 반신반의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지만, 민주주의·인권·생태라는 가치에 동의한다면 함께 손잡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것을 위해 우리가 더 노력해야겠지요.”

녹색당의 강령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작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싹틔워 인류가 지구별의 뭇 생명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초록빛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녹색당이라는 겨자씨는 싹을 틔울 수 있을까. 흙과 물과 빛을 자임할 이들이 얼마나 많아지느냐에 달렸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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