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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전자’의 부활

등록 2013-03-03 15:25 수정 2020-05-03 04:27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이끌 새 정부 장관 후보자와 청와대 비서진의 진용이 갖춰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30년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그것도 딸인 박근혜 당선인을 통해 부활한 ‘박정희의 유전자’다.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부친의 이력이 논란거리다. 그의 부친인 서종철 전 국방부 장관은 육사 1기 출신으로, 박 전 대통령의 한 기수 선배다. 서 전 장관이 일본군 소위 출신이라는 사실을 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친일 논란도 거세게 일고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에서 서종철이라는 이름은 제외됐다. 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서종철 전 장관의 경우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 해방을 맞았고, 학도병 출신으로 기록돼 자발적 입대 여부와 구체적 친일 행적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시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과 그 2세, 공직자의 경력을 발판으로 치부한 이들이 새 정부의 고위 공직 후보자에 대거 내정됐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류길재 통일부 장관 후보자,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왼쪽부터).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이정아 기자, 강창광 기자, 이정아 기자

‘박정희 시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과 그 2세, 공직자의 경력을 발판으로 치부한 이들이 새 정부의 고위 공직 후보자에 대거 내정됐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류길재 통일부 장관 후보자,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왼쪽부터).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이정아 기자, 강창광 기자, 이정아 기자

전두환·노태우가 부관이었던 장관의 아들

5·16 당시 6관구 사령관 신분으로 쿠데타에 참여한 서 전 장관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노재현·진종채와 함께 박정희 시절 ‘영남군벌 3인방’으로 꼽힌 서종철은 외국 정상들이 방한할 때마다 박 전 대통령을 수행했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단신인 박정희와 달리 서종철은 장신의 거구로 유명했다. 1966년 11월2일치 보도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전방부대를 찾은 자리에서 당시 1군사령관이던 서종철을 일부러 존슨 전 대통령과 나란히 서게 했다. 서종철 옆에 서게 된 존슨은 발돋움을 하며 “내가 서 장군보다 크지”라는 농담을 던져 좌중에 폭소가 일었다고 한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게 미국의 존재는 단순한 우방 이상이었다. 이미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한 상태였다. 양국 대통령과 수행원, 취재기자 등을 태운 기차가 지나는 철로엔 30m에 한 명꼴로 정복 경찰관이 배치됐다.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같은 기사는 “(열차에) 동승했던 백악관 출입기자는 ‘술도 공짜, 먹는 것도 공짜’에 어여쁜 여대생을 동원한 철도청 및 미군 측의 갖가지 특별 서비스에 극히 만족한 듯”이라고 전했다.

1972년 육군참모총장에서 곧바로 청와대 안보특보로 기용된 서 전 장관은 이후 1973년부터 무려 4년 동안 국방부 장관을 지낸 뒤 1978년 다시 청와대 안보특보로 복귀한다. 1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는 동안 하나회 인사들을 지원하며 깊은 인연을 맺었다. 전두환·노태우가 모두 대령 시절 그의 수석부관을 지내기도 했다. 자신의 부관 출신 인사들 중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셈이다.

그는 특히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5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 판결을 받자 곧바로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해 이를 집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과의 진정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박 당선인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사과한 인혁당 사건과 깊숙이 관련돼 있는 인물의 아들을 장관 후보자로 내정한 것이다.

정영회 “올해는 대통령과 함께 가든파티를”

또 박 전 대통령 시절 ‘개발독재 모델’의 주축이던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을 거친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는 1975년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기획한 ‘75기획포럼’의 멤버로 활약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부친인 류형진 박사도 5·16 쿠데타 이후 박 전 대통령이 의장을 맡았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고문으로 활약했다. 청와대 인선도 마찬가지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는 1974년 대통령비서실 정무1실 행정관으로 일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박 전 대통령을 꼽는 그는 부녀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보좌하게 됐다.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는 박 당선인의 동생 박지만씨가 히로뽕 투약 혐의로 네 번째로 적발된 1998년 ‘봐주기 구형’을 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정 후보자가 강력부의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근무하던 시점이었다.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히로뽕을 투약한 지만씨에게 당시 검찰은 이례적으로 벌금 1천만원에 추징금 100만원, 치료감호를 구형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정 후보자는 “기억이 없다. 구형까지 차장검사가 관여할 수는 없다”고 부인했다.

고용복지수석에 내정된 최성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정희·육영수의 이름을 딴 서울대 기숙사 ‘정영사’ 1기생이다. 1968년 설립된 정영사는 서울대에 입학한 수재들 가운데서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만 채워졌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을 정기적으로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와 다과를 대접했다. 정영사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정영회는 여전히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모철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내정자, ‘비리·의혹 백화점’ 논란 속에 최근 자진 사퇴한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류우익 통일부 장관, 문용린 서울시교육감도 정영회 회원이다. 정영회는 2월18일 서울 역삼동의 한 호텔에서 신년회를 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병재 정영회 회장(법무법인 광장 대표)은 “박근혜 당선인에게 말씀드려 올해는 당선인과 회원들이 함께하는 가든파티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퇴행의 징후’는 단순히 상징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동안 공직과 민간을 오가며 치부해온 인물들이 내각과 청와대의 요직을 꿰찬 건 어쩌면 필연인지 모른다.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와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를 필두로 황교안 법무·김병관 국방·윤병세 외교부 장관 후보자 등이 줄줄이 전관예우 논란에 휘말렸다. 직무 연관성이 높은 민간 업체가 공직에서 물러난 고위직 인사들을 선호하는 건 공적 기관을 상대로 한 로비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가히 ‘로비스트 정부’에 가깝다.

무기·시멘트 업체… 화려한 ‘로비스트 정부’

야당은 그중에서도 악질로 김병관·황교안 후보자를 꼽는다. 김병관 후보자는 2008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에서 퇴임한 뒤 무기수입 중개업체 유비엠텍에서 비상근 고문으로 일하며 2010년 7월부터 2년 동안 2억1500만원을 받았다. 독일 군수업체 엠티유 (MTU)의 제품을 취급하는 유비엠텍은 김 후보자가 고문으로 일하던 2012년 4월 국산 전차 K2에 이 회사의 부품을 장착하기로 결정했다. 또 김 후보자는 동양시멘트 사외이사로도 일했는데, 동양그룹은 지난해 주한미군과 270억원대의 공사 계약을 맺었다. 한미연합사 출신인 김 후보자가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게 논란의 요체다. 이 밖에도 김 후보자 자녀들에 대한 편법 및 변칙 증여, 차남의 특혜 취업, 배우자의 방산업체 주식 보유, 위장 전입, 부대 위문금 유용 등 다양한 의혹에 휘말려 있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 운영하는 회사의 효소식품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황교안 후보자는 2011년 8월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퇴임한 직후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17개월 동안 16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월급이 1억원에 육박한 셈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 후보자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퇴임 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고문을 맡아 지난 1월까지 모두 4년을 근무했다. 이 기간에 김앤장으로부터 윤 후보자가 받은 돈은 5억원에 이른다.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는 법무연수원장에서 퇴임한 뒤 법무법인 로고스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로펌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로펌에서 일한 기간에 매달 3천만원의 월급을 받았고, 현금 예금만 5억4700만원이 늘었다. 정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서민에 비해 많이 받은 편이지만 정당하게 벌어 잘 쓰면 그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경남 김해의 땅과 부산 재송동 아파트 문제 등 제기된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해선 “투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뒤 “과거 우리 관념엔 돈이 있으면 땅에 묻어두려는 사고가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이들 외에도 위장 전입, 논문 표절, 투기 의혹 등 전통적인 검증에서 자유로운 공직 후보자를 찾아보기가 오히려 어려운 지경이다. 2월20일 새누리당 소속인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마저 “전관예우로 천문학적 액수의 월급을 받은 그런 분이 새삼스럽게 출세까지 하겠다고 하니 국민들에게 굉장한 위화감을 줄 수 있다”며 “그런 분들은 조용히 스스로 잘 판단해서 다시 고액 봉급자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선인이 자리를 제안해도 공직 경험을 이용해 돈을 버는 길로 나섰으면 그 자리를 사양하는 게 양심”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조순형 전 의원도 “이번 인선을 계기로 전관예우를 통해 부당하게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보수를 받은 사람은 다시는 공직에 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문제가 된) 후보자들은 사퇴해야 한다”며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호소해 당선된 박 당선인이지만 인사 등 여러 가지를 보면 새 정부 출범을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된 것 같다”고 꼬집었다.

준비된 대통령? 첫 국무회의는 전 정부 장관들과

박 당선인은 2월25일 취임식을 하고 공식적인 대통령 업무에 들어간다. 하지만 정부조직법 개편과 관련한 여야의 대치가 해소되지 않았고, 김병관 후보자를 필두로 검증의 벽을 넘기 어려워 보이는 장관 후보자도 여럿이다. 그에게 대선의 길을 열었던 경제민주화 약속도, 통합과 상대 후보를 지지했던 민심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도 실종된 지 오래다. ‘불통 인수위’와 ‘나홀로·만만디 인사’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박 당선인은 당장 첫 국무회의를 이명박 정부의 장관들과 열어야 한다. 부친으로부터 독선적 리더십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의 ‘개문발차’다.

박 당선인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치른 총선에서 친박 인사들이 대거 낙천하자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고 했다. 5년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 그가 대통령이 됐다. 새 정부가 출범하는 과정에서 그 말은 온전히 박 당선인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 ‘약속의 박근혜’? 51.6%도 속았고, 48%도 속았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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