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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 투표 나이 아세요?

등록 2012-12-18 17:42 수정 2020-05-03 04:27
각국의 남녀 참정권 인정 시기

각국의 남녀 참정권 인정 시기

4046만4641명. 12월19일 대선의 유권자 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2월11일 발표한 유권자 의식조사를 보면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적극적 투표 의향층이 79.9%다. 역대 선거에서 실제 투표율은 선관위 조사보다 4~10%포인트가량 낮게 나타났다. 이를 근거로 이번 대선의 투표율이 70%대를 기록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정도의 투표율은 높은 수준일까, 낮은 수준일까. 참여연대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9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슬로바키아를 제외하고 1980년 이후 투표율 하락 폭이 가장 큰 나라”라고 밝혔다. 대선 투표율이 1997년 80.7%, 2002년 70.8%, 2007년 63% 등으로 크게 떨어진 걸 보면 70%대 투표율은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참정권의 의미를 생각하면, 꼭 높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 같다. 참정권이 끊임없는 투쟁으로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감히’ 투표하다 벌금형 받은 여성

성인 남녀에게 주어지는 참정권, 좁게 봐서 보통선거권의 역사는 서양의 경우에도 100년이 되지 않았다(표 참조). 의회정치가 가장 먼저 발달한 영국에서도 초기 참정권은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남성들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세금을 내는 계층이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확대되자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요구가 강해졌다. 선거권 확대의 또 다른 계기는 전쟁이었다. 서복경 서강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선거권 확대는 영국 의회에서 ‘노 보트, 노 택스’(참정권 없이 납세도 없다)로 출발했고,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납세자가 아닌 시민, 하층민, 여성 등의 투표권 확장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특히 여성의 투표권 쟁취 투쟁은 길고 과격했다. 1903년 영국에서는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여성사회정치연맹을 조직하고 수년간 시위를 벌였다. 런던의 여성 시위대는 시내 건물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18년 영국 정부는 30살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했다.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된 건 10년 뒤의 일이다. 미국에서는 1848년 뉴욕에서 열린 첫 여성권리대회를 계기로 여성 참정권 운동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1872년 뉴욕주의 한 투표소에서 ‘감히’ 투표를 한 수전 앤서니에게 벌금형이 떨어졌다. 참정권 쟁취를 위한 그의 노력은 1920년에야 결실을 맺었다. 최근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지난해 9월 “다음 임기 때부터 여성들은 지방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고 후보도 선출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사우디는 “여성은 월경주기에 따라 감정에 휘둘려 일관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등 해괴한 논리로 여성의 정치 참여를 봉쇄해왔다. 사우디 여성들은 2015년 지방선거에서 처음 투표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은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때부터 보통선거의 원칙이 명시됐다.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선거인 5·10 제헌의회 선거는 21살 성인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는 전면적인 보통선거로 실시됐다. 선관위는 5월10일 ‘유권자의 날’ 성명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서구와는 달리 참정권 쟁취의 험난한 과정을 한꺼번에 뛰어넘었다. 아쉬운 점은 선거권의 소중함과 무게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너무 당연시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당연한 선거권’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제헌의회에 앞서, 미군정은 1946년 과도입법기구인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세대주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우익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중도파가 참여한 형태였다. 당연히 미국의 제도를 모델로 한 선거법이 만들어졌다. 박찬표 목포대 교수는 선거법 제정 과정을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국민 동원을 위한 민주화”로 규정한다.

20살→25살→23살→21살→20살→19살
한국에서는 1948년 제헌 헌법 제정을 통해 남녀에게 동등한 선거권이 ‘한꺼번에’ 주어졌다. 전쟁 중에도 선거는 실시됐다. 1952년 8월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를 업은 여성이 투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한국에서는 1948년 제헌 헌법 제정을 통해 남녀에게 동등한 선거권이 ‘한꺼번에’ 주어졌다. 전쟁 중에도 선거는 실시됐다. 1952년 8월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를 업은 여성이 투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미군정은 자체적으로 만든 보통선거법 초안을 과도입법의원에 보냈다. 소선거구제·절대다수대표제를 기반으로 했고, 선거권·피선거권 연령은 각각 20살과 25살이었다. 그러나 우익 세력이 장악한 과도입법의원의 법사위는 선거권·피선거권 나이를 25살과 30살로 높이려 했고, 중도파는 격렬히 반대했다. 미군정의 개입으로 투표 연령은 23살, 피선거권은 25살로 확정됐다. 당시 미군정의 존 하지 사령관은 “23살안은 약간 높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눈길이 험악한 청년들을 본다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투표권을 갖는 나이는 이후 1960년 민법상 성인인 20살로 낮춰졌고, 2005년 19살로 하향 조정됐다.)

과도입법의원이 만든 선거법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투표 방식이었다. 기표 방식(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자서 방식(후보 이름을 쓰는 방식)을 택했다. 서복경 선임연구원은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사실상 하위 계층을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장치였다”고 말했다. 또 친일파와 부일 협력자들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은 우익 세력의 반대로 사문화했다.

그런데 단독정부 수립 노선이 확정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우익 세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과도입법의원 선거법에 따라 선거를 치르자고 주장했으나,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치르게 되자 법은 대폭 수정된다. 투표 연령은 21살로 낮춰졌고, 자서 방식도 기표 방식으로 바뀌었다. 박찬표 교수는 에서 “전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 대표기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법 제정 과정에서 미국이 1차적으로 고려한 것은 반공블럭 구축을 위한 우파의 안정 다수 의석 확보였음에 반해, 좌파 배제하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것으로 선거법의 성격이 변화되자 미국은 민주적 보통선거제 도입을 우선시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대선 투표권, 잃어버린 15년+α

어쨌든 1948년 헌법 제정을 통해 남녀에게 동등한 선거권이 부여됐다. 그러나 선거권 행사에는 많은 왜곡이 뒤따랐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직선제가 ‘체육관 선거’로 바뀌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을 선포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체육관 선거(1972·78년)를 치렀다. 최규하(1979년)·전두환(1980년) 대통령도 뒤를 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독창적으로’ 대통령선거인단을 통한 체육관 선거(1981년)도 했다. 불과 30~40년 전 일이다. 국민이 대통령 투표 용지를 다시 손에 쥔 것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다. ‘참정권 쟁취’의 험난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참고 문헌

(박찬표·후마니타스), (한국역사연구회·역사비평사)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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