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진보 정당은 6·15 정신에 따라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북의 권력 승계 문제는 국민 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견해를 존중한다.”
지난 6월1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및 민주노총 등 시민단체로 구성된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연석회의)가 최종 합의문을 발표한 직후부터 이 문장은 새로운 분란의 불씨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북한 체제와 3대 권력 승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주장과 3대 세습 등을 확실히 비판해야 한다는 진보신당의 주장을 그저 앞뒤로 이어붙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희식 현실 정치의 신호탄
전망은 정확했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의 합의문 해석을 놓고,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공개 편지를 통해 ‘왜곡’이라며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먼저 두 사람의 발언을 합의문과 비교해보자. 조승수 대표는 지난 6월2일 한국방송 라디오 에서 “합의문은 (새로운) 진보 정당이 북한 권력 승계에 비판적이고,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비판할 것이라는 표현이다. 3대 세습 자체가 민주주의나 우리 국민 정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정희 대표는 지난 6월10일 “‘북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새로운 진보 정당 자체는 권력 승계 문제에 대해서도 6·15 정신에 따라 이 입장(인정)을 취한다는 뜻이다. 따옴표 안에 들어 있는 것(북의 권력 승계 문제 비판)은 당내 의견의 하나로, 소수 의견 존중의 원칙에 따라 ‘존중’되는 것으로 이 의견을 놓고 토론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반박했다.
이 대표 말대로 조 대표의 해석이 ‘왜곡’이라면, 이 대표 자신의 주장도 왜곡이 아니라고 보긴 어렵다. 더구나 이 대표는 권력 승계 비판과 관련해 “견해를 존중한다”가 아니라 “견해가 있음을 존중한다”로 잘못 인용했다. 한 끗 차이지만, 그냥 ‘의견’이 ‘당내 의견의 하나’로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내가 당원으로 있게 될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이 이런 인식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합의한 바가 전혀 없다. 당원들 앞에 그대로 말해달라. 지금 당장은 조 대표 인터뷰처럼 이해하는 (진보신당) 당원들이 많아지면 합의문 통과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다.” 조 대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인 대목은, 오는 9월까지 통합진보정당을 만들자고 약속한 상대방에게 하는 말로 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 때문에 조승수 대표와 진보신당은 물론, 민주노동당 내부까지 혼란에 휩싸였다. 대체 이 대표는 뭘 노린 걸까? 이와 관련해 민주노동당 안팎에선 이 대표가 ‘이정희식 현실 정치’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18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한 이 대표는, 그 전까지 민주노동당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다. 지금의 당권파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대중적 인기만으로 지난해 당 대표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미디어법 저지 투쟁 등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쌓은 ‘진심의 정치인’ 이미지도 계파 구도가 복잡한 당내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인사 등 당 내부 문제를 결정할 때마다 당권파에게 휘둘렸고, 이 대표가 참석한 연석회의 합의도 당권파의 반발로 뒤집히는 등 난항을 겪는 일이 적지 않았다. 정치인으로 더 성장하려면, 이 대표 스스로 당 안에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룰 수 없는 참여당 논의”여기서, 진보 양당 내부에 진보 정당 통합과 관련해 찬반이 팽팽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진보신당 독자파가 반대파로 분류된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진보신당 대통합파(복지국가 단일정당론)도 야권 정당 대통합을 주장하며 진보 양당 선통합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정희 대표와 조승수 대표는 진보 대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저버릴 수 없는 처지다. 이 때문에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절충’으로도 보기 어려운 합의문에 서명했고, 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 대표는 이런 상황의 돌파구로 ‘합의문 왜곡론’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통합 합의는 했기에 시민사회 등에서 ‘욕’먹을 일은 없고, 두 당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3대 세습 문제를 건드림으로써 당내 반발을 잠재우는 동시에 진보신당 독자파 등을 더욱 자극한 셈이 됐다. 더구나 편지를 공개한 날은 연석회의 합의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진보신당 전국위원회 하루 전날이었다.
이런 해석의 근거가 될 만한 정황은 이 대표의 공개 편지의 다른 대목과 지난 6월7일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도 포착된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겠다. 진보와 개혁을 위한 열망과 가치를 공유한다면 과감하게 손잡겠다”는 7일 발언은, “(국민참여당의 연석회의 참여 요청과 관련해) 정당이 참여하겠다고 요청하는데 국민들이 공감할 만한, 책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있는 때도 아니다”라는 10일 편지의 구체적 압박으로 강도가 세졌다. 또 이 대표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함께 야권 통합 등에 관련된 라는 책을 공동 출간하고, 6월16일 출판기념회도 연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은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그리는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다.
진보신당의 동요를 우려한 강기갑·정성희 민주노동당 진보정치대통합추진위원회(통추) 공동위원장은 이 대표가 편지를 공개한 직후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열었다. “진보신당 동지들은 민주노동당의 당심에 확고한 믿음을 보내달라”며 “(연석회의 합의문을 통과시켜)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역사적 진보 대통합으로 가는 결정을 해주시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강 위원장은 앞서 지난 6월9일에도 이 대표의 국회 연설과 관련해 “이 대표의 메시지는 연석회의 합의문을 흔들고 있는 것이며,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맞대응 자제하는 조승수 대표그래도 부글부글 끓는 진보신당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핵심 당직자의 얘기다. “이건 ‘너희가 통합 논의의 판을 깨라’고 진보신당 독자파한테 던진 메시지다. 6월11일 전국위원회와 6월26일 당대회를 거치며 연석회의 합의안은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 사이 민주노동당이 6월17~18일 당대회에서 합의안을 가결하더라도, 통합엔 제동이 걸리고 책임은 우리가 다 떠안는다. 또한 이건 진보 대통합을 주장하는 조승수 대표, 노회찬·심상정 전 대표에게 ‘백기’를 들면 받아주겠다고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통합론을 철회할 수도 없고, 분노한 독자파 당원들 속에 그대로 있기도 힘든 상황 아니냐.”
하지만 조승수 대표는 “지금 공개적으로 (이 대표에게 맞대응해)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합의안의 의미를 당원들에게 최대한 설득하고, 통합진보정당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할 때”라며 맞대응을 자제했다. 분란을 더 키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나는 이 당에 무한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진보신당의 깃발을 마지막까지 잡고 갈 것이다. 현재 합의안을 포함해 우리 당원들이 어떤 전략적인 판단을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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