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오른쪽)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오찬 회동을 위해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민생’과 ‘통합’.
6월3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청와대 오찬 회동을 놓고,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 모임을 관통하는 핵심어가 민생과 통합이라고 입을 모았다. 익숙한 단어들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연대·연합을 승부수로 여기는 야당이 내세우는 단어들과 똑같다.
지난해 8월 이후 10개월 만에, 박 전 대표의 지난 5월 네덜란드·포르투갈·그리스 유럽 3개국 특사 방문 보고를 위한 자리가 끝난 뒤,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와 별실로 자리를 옮겨 55분 동안 단독 회동을 했다. 회동을 마친 뒤 박 전 대표는 국회 의원회관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전했다. 이 정부 들어 두 사람은 7차례 만났지만, 이날처럼 박 전 대표가 즉시, 그것도 직접 기자들에게 모임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한 건 이례적이다. 회동 시간과 장소, 의제는 물론 이후 언론 공개까지 양쪽이 조율하고 합의해야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도 박 전 대표가 직접 기자들 앞에 나서는 데 동의했다는 이야기다.
왜 그들은 민생과 통합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왜 박 전 대표는 회동 관련 이야기를 직접 하겠다고 결심한 것일까? 실마리는 박 전 대표가 밝힌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정치 논리보다는 민생에 초점을 둬야 하고, 분열보다는 통합으로 가야 한다. 그런 선상에서 저도 당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이 대통령은 “그렇게 힘써달라”고 답했다. 박 전 대표는 “진정성 있는 민생 문제 해결 등을 국민 앞에 인정받아야 신뢰를 회복하는 길도 열리고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고, 이 대통령은 “그렇게 해달라”고 답했다. 박 전 대표는 “국정의 중심을 민생에 둬서 성장의 온기가 일반 국민 모두에게 와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고 했고, 이 대통령은 “국정을 서민과 민생, 저소득층 중심으로 이끌겠다”고 했다.
박 전 대표의 발표임을 고려하더라도, 이날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구조는 ‘박근혜의 건의 또는 제안’ → ‘이명박의 동의 또는 수용’이다. 대화를 주도한 사람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박 전 대표였다.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에게 자신의 ‘요구’를 모두 꺼내놓을 만큼 자신감이 커졌고, 이 대통령은 이를 모두 수용해야 할 만큼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과도한 해석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이 대통령은 그동안 정운찬 전 총리, 김태호 의원 등 박 전 대표 말고 다른 차기 대선주자 카드를 고르고 또 골랐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정권 창출 ‘동업자’였던 한나라당 내 이명박계는 뿔뿔이 흩어져, 당에서 자신의 의중을 관철시키기도 어려워졌다. 특히 지난 4·27 재·보궐 선거 패배 이후 당은 급속히 신주류 중심으로 재편됐고, 이젠 당 지도부가 부자 감세 철회, 반값 등록금 실현 등을 요구하며 대통령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는 형국이다. 이 대통령이 “없다”고 자신한 레임덕이 진행되며 ‘고립’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반면에 박 전 대표는 여전히 독보적인 차기 대선주자 1위다. 이 대통령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만큼 당의 무게중심은 그에게로 쏠린다. 7월 전당대회에서도 이변이 없는 한 구주류에게 당권을 뺏길 가능성은 없다.
이런 객관적인 조건에서 두 사람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치러야 한다. 대선 전초전인 총선에서 지면, 두 사람은 모두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를 막으려면 이 대통령에겐 박 전 대표만 한 ‘창’이 없고, 박 전 대표에겐 자신의 대권 가도를 방해하지 않는 이 대통령이 ‘방패’가 될 수 있다. 다시 ‘민생’과 ‘통합’, “최선을 다하겠다”와 “그리 하라”는 말을 곱씹어보면, 이는 곧 총선과 대선을 겨냥해 두 사람이 ‘신사협정’을 맺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이날 박 전 대표가 전당대회와 관련해 “(이 대통령은) 말씀하신 것(민생과 통합)을 실천하는 지도부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고, 그렇게 돼야 한다”고 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민감한 현안이라 일부러 말을 아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나치게 원칙론에 그쳤다는 인상을 준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와 한나라당에선 “박 전 대표 쪽에서 처음부터 전당대회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청와대에선 새 지도부와 관련한 박 전 대표의 뜻을 묻고 싶어했으나, 박 전 대표가 거절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가령 김무성 전 원내대표는 청와대 쪽에서 새 대표감으로 생각하지만 박 전 대표와는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지 않았나. 전당대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박 전 대표 쪽이 괜히 특정인을 놓고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큰 틀의 국가 정책 이야기만 하면서 이 대통령과 대등한 위치의 ‘파트너’라는 점만 강조하는 게 전략적으로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박 전 대표의 잠재적 경쟁자인 이재오 특임장관의 예민한 반응도 이런 기류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회동이) 특사 보고 이외 다른 정치적 의미를 낳는 것은 당에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어 두 분 모두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는 6월1일 이 장관의 발언은 청와대와 박근혜계 양쪽의 비판을 샀다. 이틀 뒤 이 장관은 자신의 트위터에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으로 1965년 군이 대학을 점령하고 위수령을 내리고 드디어 저는 대학에 제적과 함께 수배가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갈림길이었습니다. 오늘은 1964년 6월3일 군이 계엄령을 내려서 학생운동을 탄압한 그날입니다. 47년 전입니다”라고 썼다. 이 장관 쪽은 “인생의 갈림길이 된 6월3일을 맞아 개인적 소회를 밝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위수령을 내린 장본인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뉘앙스의 글을 하필이면 청와대 회동을 앞둔 시각에 올린 것은 여러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글은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는데, 이 장관은 평소 몹시 화가 나거나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황에서 트위터에 글을 쓸 때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여당 내 야당’ 신세를 면치 못하던 박근혜계는 한껏 고무됐다. 한 측근 의원은 “앞으로 대선주자로서 박 전 대표의 활동 보폭이 더욱 넓어지고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적극적인 대선 행보를 통해 박 전 대표가 민생도 챙기고, 정부 정책에 쓴소리를 하더라도 이 대통령이 그 정도는 양해한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며 “그럼으로써 이 대통령도 이반된 민심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고, 박 전 대표도 이 대통령에게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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