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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서민, 속으론 재벌

MB 정부는 ‘친서민’ 자화자찬해도, 국민은 ‘대기업’ 정부로 인식…친기업 정책 폈지만 낙수효과 없어 한나라당에서도 반성 나와
등록 2011-05-12 15:01 수정 2020-05-03 04:26

이명박 대통령은 ‘성장’과 ‘복지’ 가운데 어떤 것을 중시할까?
이 대통령이 64차례 진행한 라디오 연설을 보면 복지보다는 성장 위주다. 연설문을 분석해 보니 ‘성장’(74번)이 ‘복지’(25번)보다 3배 가까이 많이 언급됐다. 이 대통령은 연설에서 서민도 강조했다. ‘대기업’(26번)보다는 ‘중소기업’(56)이, ‘부자’(2번)보다는 ‘서민’(88)이 자주 등장했다. 이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공정사회’ ‘친서민 정책’을 강조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말로는 ‘서민’ ‘경제’ ‘일자리’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 같다. 경제개혁연구소가 5월4일 발표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대부분이 ‘대기업 중심’이라고 답했다. 800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는 ‘매우 대기업 중심’(58.3%), ‘다소 대기업 중심’(26.8%)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요컨대 정부 정책이 대기업 중심이라고 판단하는 국민이 85.1%나 되는 셈이다. 반면에 ‘중소기업 중심’이라는 답은 8.3%에 불과했다.

»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대기업 프렌들리’를 기치로 법인세 인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2008년 9월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자 감세’로 비판받은 세제 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대기업 프렌들리’를 기치로 법인세 인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2008년 9월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자 감세’로 비판받은 세제 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세금 정책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부유층에 유리하다’는 응답이 88.6%로 절대 다수였다. ‘서민층에 유리하다’는 답은 6.5%에 불과했다. 또 정부의 경제정책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재벌·대기업’ (61.3%), ‘전경련 등 경제단체’(15.6%) 등이 꼽혔다. 반면에 ‘시민단체’(3.3%), ‘중소기업’(3.1%), ‘소비자단체’(1.5%), ‘노동조합’(1.2%) 등은 별 영향력이 없다는 응답이다. 그 결과 경제정책 평가는 A·B·C·D·F 가운데 ‘C’(40.8%)가 가장 많았고, 다음은 ‘D’(22.3%), ‘B’(17.4%), ‘F’(16.4%), ‘A’(3%) 등의 순이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정부 정책을 후하게 평가한다. 대통령은 47차 라디오 연설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라며 “영국의 는 우리나라를 ‘경제회복의 모범’으로 평가했습니다”라고 자찬했다.

이 대통령의 집권에는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경제 대통령’ 이미지가 큰 도움이 됐다. ‘MB 747 공약’을 내걸고 5년간 연 7% 경제성장,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을 달성하겠다고 공언했다. 취임 이후에도 계속 경제를 강조했다.

“우리는 두 차례 경제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세계경제의 중심 국가 반열에 올랐고, 세계경제에 관한 최상위 협의체라 할 수 있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되었습니다.”(51차 라디오 연설)

“우리는 45개국과 FTA를 맺어서, 경제 영토를 전세계적으로 계속 넓혀나가고 있습니다.”(56차 라디오 연설)

64번의 라디오 연설에 ‘경제’가 모두 247번 등장한다. 또 ‘위기’(149번) 상황이나 극복을 강조하고, ‘일자리’(128번)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출자총액제 폐지해도 투자는 늘지 않아

»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언급한 주요 단어

»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언급한 주요 단어

하지만 이 대통령의 경제정책으로 대표되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는 초기부터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 기조에 따라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지주회사 관련 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등을 밀어부쳤다. 하지만 재벌의 고용은 늘어나지 않았고,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됐다. 특히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자 한동안 1달러당 1500원이 넘는 고환율을 유지해 고물가의 고통을 국민한테 떠넘기는 대신 수출 대기업에 막대한 부를 몰아주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지난 4월 발표한 ‘15대 재벌의 설비투자액 추이 분석 결과’를 보면, 15대 재벌의 출자총액은 2007년 50조3천억원에서 2010년 92조8천억원으로 84.7% 늘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설비투자액은 40조3천억원에서 55조4천억원으로 37.5% 느는 데 그쳤다. 곧, 재벌의 ‘곳간’은 커졌지만 고용을 늘리는 데 필요한 투자는 크게 늘지 않은 셈이다. 매출액 대비 설비투자액 비중은 2007년 7.1%에서 2010년 6.2%로 오히려 0.9%포인트 줄었다. 당기순이익 대비 설비투자액 비중도 이 기간 99%에서 85.3%로 13.7%포인트 감소했다.

이에 대해 경실련은 “그동안 재벌이 설비투자의 걸림돌로 지목해온 출자총액제한제도가 폐지되고 법인세율이 인하됐지만 정작 설비투자는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이라며 “출자총액과 설비투자액의 상승폭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재벌들이 투자보다는 지분 매입을 통한 계열사 확장에 더 주력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와 재벌의 갈등이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를 통해 ‘공정사회’를 내걸었다. 올해에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초과이익공유제’ ‘중소기업 적합업종 및 품목 선정’을,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이 ‘공적 연기금 의결권 행사’ 등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에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반응처럼 대기업 쪽은 정부의 움직임에 냉소적인 태도다.

이에 대해 경원대 홍종학 교수(경제학)는 “정부와 재벌 간 갈등은 당연한 결과”라며 “그동안 친기업 정책을 펼치며 특혜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재벌은 이를 당연한 권리로 여겨 (사이가) 벌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미국 후버 대통령도 기업인 출신으로 집권 뒤 각종 친기업 정책을 풀었지만 그로 인해 투자나 고용이 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감세로 고용·투자 증가 입증 안돼”

한나라당 안에서도 반성은 나온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 그룹이 지난 5월4일 법인세 인하 철회 법안을 제출했다.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 의원 13명이 제출한 ‘법인세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법인세 과표구간에 ‘100억원’을 신설해 100억원 초과구간은 22% 세율을 유지토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현행법은 내년에는 과세표준 2억원 이상은 세율을 22%에서 20%로 인하하도록 돼 있다. 소장파 그룹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감세로 인해 고용이나 투자가 증가된다고 입증된 사실이 없고, 최근 서민경제의 침체로 고물가, 전세난 등 국민의 고통이 더욱 커지면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라고 법률 제안 이유를 밝혔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과표기준 2억원 이상의 감세 철회를, 민주노동당은 과표기준 1천억원 이상을 추가해 30% 세율을 매기자는 제안을 내놨다.

‘친기업’을 표방해온 이명박 정부가 뒤늦게 외치는 친서민 정책이 효과를 낼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추진하는 ‘초과이익공유제’는 위원회 안에서도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한 위원은 “안을 만들더라도 자율적으로 하라는 건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정훈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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