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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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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꽃 연합, 연합의 꽃 감동

정치 연합의 시너지 +α를 끌어내는 진정성…단일화했지만 낙선한 김해을 선거가 주는 교훈 새겨야
등록 2011-05-05 10:03 수정 2020-05-03 04:26

4·27 재보궐선거는 한나라당 후보와 야권 단일후보 간의 싸움이었다. 야권은 모든 지역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냈다. 물론 단일화의 과정과 효과는 지역마다 달랐다. 전남 순천시와 경남 김해시의 단일화는 같은 야권 단일화였지만 단일화의 동력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까지 판이했다. 두 지역의 상반된 사례는 내년 총선, 대선으로 가는 도정에서 야권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야권 후보 단일화의 험로를 미리 짚어보게 해주는 리트머스시험지라 하겠다. 야권 후보 단일화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며 후보 단일화를 하더라도 선거에서 질 수도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이 이번 두 사례가 보여준 정치 현실이다. 야권 후보 단일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4·27 재·보궐 선거의 선거운동 개시일 하루 전인 4월13일 국회에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야권 연대 협상 타결을 선언한 뒤 손을 잡고 있다.

4·27 재·보궐 선거의 선거운동 개시일 하루 전인 4월13일 국회에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야권 연대 협상 타결을 선언한 뒤 손을 잡고 있다.

선제적 양보에 필수인 합리적 신뢰

정치 연합은 이론과 이념과 가치의 문제인가, 판단과 선택과 행동의 문제인가. 6·2 지방선거 뒤 단속적으로 전개돼온 그간의 정치 연합 논의는 의제 설정 단계라는 시기적 특징 때문인지 판단과 선택과 행동의 현실 문제라기보다는 이론과 이념과 가치 담론의 문제처럼 다루어져왔다. 어느 정도 불가피했지만 그렇다고 그간의 논의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이론과 이념과 가치 차원에서 정치 연합이 논의됐다면 적어도 연합의 대의명분에 대해서만은 당위론적·역사적·현실맥락적으로 잘 설명됐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 국민이 야권의 정치 연합 논의에 접근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대목, 즉 정치 연합의 대의명분의 혼란이다. 무엇을 위한 정치 연합인지 대중이 이해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설명과 선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한나라당과 보수 단체를 제외한 모든 야당과 시민단체가 입만 열면 당위론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야권 정치 연합 아닌가. 민주당만으로는 총선, 대선 승리가 어렵다며 총선, 대선 승리의 전략적 침로로 제시돼온 것이 야권 정치 연합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러나 정작 이 연합론의 대중적 깃발이어야 할 대의명분이 대중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간의 정치 연합 담론을 정치 현실과 유리된 정파 간 토론으로 보는 이유다.

통합은 최대강령적 행동이고, 연합은 최소강령적 선택이다. 통합은 중심을 강화하는 것이고, 연합을 주변을 확장하는 것이다. 통합은 가치와 이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연합은 당면의 현실적 요구와 상황에 복무하는 것이어야 한다. 통합은 보수 통합 또는 진보 통합으로 나타나고, 연합은 민주주의 연합, 민생 연합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중도·중간·부동층 공략이 승부의 관건이 될 내년 총선, 대선은 중심을 강화하는 통합론과 외연을 확장하는 연합론 중 어느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해야 야권연합론이 밀실을 벗어나 대중의 바다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 연합의 낮은 형태는 정책 연합이고 최고 형태는 후보 단일화다. 후보 단일화는 선거 국면에서의 공동 행동, 공동 선택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합은 양보를 통해 더 큰 것을 얻으려는 전략적 행동이다. 연합의 당사자들은 더 큰 것을 얻기 전에 먼저 양보부터 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선제적 양보를 결행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먼저 양보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구체적 확신이 필요하고, 상대가 약속을 지켜줄 것이라는 합리적 신뢰가 필요하며, 선제적 양보에 저항하는 내부를 설득·제압할 수 있는 강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더라도 선제적 양보가 연합의 승리로 귀결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 불투명한 승부의 세계를 헤쳐가야 하는 것이 연합이다. 연합을 정치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다.

DJP 연합의 시작과 끝

김대중-김종필 연합은 연합정치의 시작과 끝을 잘 보여준다. DJP 연합은 최소강령 연합이 어떤 것인지, 최소강령 연합이 어떻게 외연을 극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DJP 연합은 ‘연합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연합의 한 축은 대통령이 되었고, 또 다른 한 축은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국무총리가 된 김종필은 경제부처 장관에 대한 사실상의 인사권을 행사했다. DJP 연합은 연합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도 보여주었다. DJP 연합이 정책적 이견으로 중도에 파기되자 김대중 정부 또한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DJP 연합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안정적 국정 운영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정치 연합의 또 다른 사례인 노무현-정몽준 연합은 연합의 극적 과정과 허무한 종말, 그럼에도 남는 정치적 위력이라는 연합론의 세 가지 요소를 잘 보여주었다. 빡빡한 계산과 이중·삼중의 정략적 협상을 뛰어넘는 연합의 힘찬 동력이 자기 몸을 먼저 던지는 진정성임을 보여주었고, 그 진정성만이 대중을 감동시키고 연합의 시너지인 +α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해서 감동으로 모인 표는 연합 당사자의 ‘정치적 배신’에도 흩어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결집력을 갖는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후보 단일화건 야권 통합이건 정치 연합의 궁극적 목적은 선거 승리다.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후보 단일화 방식이건 통합당 건설 방식이건 가릴 일이 아니다. 기술적 문제에 가치 판단을 개입시킬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는 정치 연합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다.

정치 연합이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려면, +α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정치 연합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연합은 했는데 +α가 생기지 않는다면 힘들여 연합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지난해 6·2 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단일화가 그랬고, 4·27에서 김해을 후보 단일화가 또한 그랬다. 두 번 다 길고 지루한 단일화 협상 끝에 단일화에는 성공했으나 선거에서는 졌다. 이 두 번의 실패 사례에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을 우연으로 돌릴 수 있을까? 두 번의 실패로 인해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이 끼면 될 정치 연합도 안 되고 되더라도 선거 승리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야권 연합을 대중의 바다에

+α는 감동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정치 연합의 성공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대중적으로 확산될 때 +α도 커진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막판 JP가 DJ의 손을 들었을 때 마침내 ‘40년 한을 풀 수 있겠구나’라고 느낀 호남인들의 벅찬 감동이 DJP 연합의 +α 효과를 극대화했다. ‘져도 좋다. 역사의 후퇴만은 막아야 한다’며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막판 단일화에 투신한 노무현의 진정성이 노무현-정몽준 정치 연합의 감동을 만들어냈고, 기대 이상의 +α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7·28 재·보궐 당시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광주 유세 중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한나라당 2중대’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정희 대표는 서울 은평으로 달려가 야권 단일후보 장상의 손을 잡고 지원 유세에 나섰다. 야권 연합은 이런 진정성으로 만들어가는 정치예술이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더 이상 야권 연합을 자신들의 전략 사무실에 가둬두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우물쭈물 말고 야권 연합을 대중의 바다에 힘차게 던져야 한다. 결과가 열려 있을 때만 민주주의다. 야권 연합을 당리당략의 좁은 틀에 가두지 말고 대중의 바다에서 놀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연합적인 방식이며 가장 힘있는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야권연합론의 질적 도약을 기대한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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