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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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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다음은 또 누구냐

청와대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사찰한 의혹도 불거져…

<한겨레21>이 입수한 수첩엔 공기업 노조 관련 내용도 포함
등록 2010-12-16 17:25 수정 2020-05-03 04:26

이젠 놀랍지도 않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에 사찰당했다는 의혹은, 당연한 일이 너무 늦게 알려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이 정부에서 벌어진 불법사찰이 ‘반대세력 제거’에 철저했기 때문일까.
지난 12월7일 이석현 민주당 의원이 제기한 ‘박근혜 사찰 의혹’의 진원지는 또다시 청와대다. 민간인인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를 불법사찰하고 증거를 인멸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이 아니라, 지원관실이 저지른 범죄의 ‘윗선’ 의혹을 받는 바로 그 청와대다. 박 전 대표를 뒷조사했다는 의혹을 받는 이는 국정원 출신의 이창화 전 청와대 행정관인데, 박영준 지식경제부 2차관이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으로 있을 때 부하직원이다. 그런데 박 차관은 이 전 행정관과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나 업무에 있어서나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837호 이슈추적 ‘청와대로 향하는 불법사찰 번지수’ 참조). 참으로 신기한 수수께끼다.

청와대 비서관 별명이 지원관실 수첩에

이석현 민주당 의원이 12월7일 민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이 청와대에 근무할 때 부하직원인 이창화 전 행정관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사찰했다’는 의혹을 추가로 제기했다. 이 의원이 가리키고 있는 원충연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조사관의 수첩엔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2B’라는 메모가 선명하다. 한겨레 김경호

이석현 민주당 의원이 12월7일 민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이 청와대에 근무할 때 부하직원인 이창화 전 행정관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사찰했다’는 의혹을 추가로 제기했다. 이 의원이 가리키고 있는 원충연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조사관의 수첩엔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2B’라는 메모가 선명하다. 한겨레 김경호

이창화 전 행정관은 2008년 상반기 씨앤(C&)그룹 임병석 회장의 누나가 경영하는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이성헌 한나라당 의원이 식사한 것을 사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일식집 주인인 임 회장 누나와 종업원에게 ‘이성헌 의원이 왜 박 전 대표를 일식집에 데려갔는지’ ‘박 전 대표가 임 회장을 만났는지’ 등을 물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그런 얘기(사찰)는 많이 있지 않았느냐”며 일식집에 갔는지 등에 대해선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이성헌 의원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끝난 2007년 9월10일께 박 전 대표와 그 일식집에 간 적이 있지만, 임 회장은 만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시점은 다르지만, 박 전 대표가 그 일식집에 간 것이 사실로 확인됨으로써 사찰 의혹을 단지 야당의 ‘무책임한 폭로’로 보기는 어려워졌다.

이 전 행정관은 청와대 근무 때 박 전 대표 말고도 김성호 전 국정원장, 정두언·정태근 한나라당 의원 부인, 정세균 민주당 전 대표 등을 광범위하게 사찰했다는 의혹을 산 바 있다. 여기에 이 전 행정관이 사찰했을 법한 대상자 명단에 박 전 대표가 또다시 추가된 것이다. 지원관실이 설치된 2008년 7월 말 이전부터 청와대 혹은 청와대의 누군가가 ‘반대세력’을 사찰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 셈이다.

이석현 의원은 청와대가 주도한 사찰 의혹과 관련해 주목을 끄는 메모도 공개했다. 원충연 전 지원관실 조사관의 수첩 사본엔 “2B 입장에서 조금 더 정확한 자료, 빠르게 조사”라고 적힌 대목이 나온다. 이 문구는 참여정부 말인 2007년 12월 취임한 이재웅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관련한 메모와 함께 등장한다. ‘2B’는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의 별명인 ‘이비’를 숫자와 영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세웅의 로비 코드, 임명 배경’ 등의 표현이 적힌 것으로 미뤄볼 때 이 전 총재를 사임시키려고 이 전 비서관과 지원관실이 개입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전 총재는 취임 1년도 안 된 2008년 10월 사임했는데, 이를 놓고 이명박 정부의 ‘밀어내기 인사’ 논란이 일었었다.

민영화 반대 노조조직 사찰 정황

수첩엔 공기업 노조의 동향과 노조 간부들의 성향, 구조조정 관련 내용이 적힌 대목도 있다. 특히 이 이석현 민주당 의원을 통해 추가로 입수한 원 전 사무관의 수첩엔 ‘기간산업 공동투쟁본부’(공투본), 토지공사·주택공사 등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 있다. 공투본은 가스·전기·철도·지하철·항공 등 민주노총 소속 10개 노조가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추진에 맞서 2008년 6월 출범시킨 조직이다. 당시 이들의 민영화 반대 주장은 ‘광우병 쇠고기’ 촛불과 맞물려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정부는 결국 “전기·가스·수도·건강보험은 이명박 정부가 끝날 때까지 민영화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촛불이 잦아들자마자 정부는 가스 부문 경쟁체제 도입, 한전 자회사 민영화, 토지공사·주택공사 통합, 인천공항공사 민영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공기업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공기업 노조는 정부가 ‘민영화는 없다’던 약속을 사실상 뒤집은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런 상황으로 미뤄보면, 지원관실의 공기업 노조 동향 파악은 구조조정 반대와 관련돼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물론 공기업 자체는 지원관실의 업무 소관이 아니다. 하지만 지원관실은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갖은 방안을 짜낸 것으로 보인다. 2008년 10월30일 지원관실은 ‘2008년 공직기강확립 업무지침’을 내고 “공기업 선진화를 위해 정부 감사실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정책훼손 사례가 발생할 경우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직접 조사해 기관장 엄중경고 등의 조치를 하겠다. 특정 정당 당론이나 정치인의 의사에 경도돼 국정과제 수행을 방해하는 등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고, 고위 공직자의 정부 정책 비방,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부당업무 처리 사례가 발생할 경우 엄정 조치키로 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공기업 선진화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 편향성 때문에 국정과제 수행을 방해하는 일로 못박고, ‘공직 감찰’이라는 칼로 비판의 싹을 자르겠다는 얘기다.

지원관실의 윗선으로 지목받는 박영준 차관과 이영호 전 비서관은 공기업 인사와 단체협상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820호 표지이야기 ‘박영준·이영호, 공기업 단협에도 개입’ 참조). 의혹대로라면, 정권 실세와 지원관실은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공무원과 공기업 노조를 잡도리하면서 인사와 단협 개입을 통해 공기업을 폭력적으로 길들였다는 얘기다.

징계는커녕 감싸는 청와대

더 많은 의혹이, 더 충격적인 의혹이 ‘추가’로 제기되면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청와대는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이 무시로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이영호 전 비서관, 대포폰을 지급한 최아무개 행정관 등을 여러 차례 만난 사실을 두고 “통상적인 업무 협의차 방문”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최 행정관의 대포폰 지급 사실과 관련해선 “검찰에서 불법사찰에 관계되지 않은 것으로 연락이 온 것으로 안다”며 징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검찰 역시 앵무새처럼 ‘재수사 불가’를 되풀이한다. 이들이 정말 무서워하는 게 따로 있는 걸까? 자신들을 지켜보는 국민보다 더 무서운 힘이 진실 규명을 가로막는 것일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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