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이겼다. ‘삼성 X파일’에 등장하는 ‘떡값 검사’의 이름을 공개한 ‘죄’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던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12월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과 삼성을 상대로 한 그의 싸움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노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게다가 검찰이 삼성 X파일의 진위를 가리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바 있다.
12월9일 오전 서울 여의도 진보신당 당사에서 노 대표를 만났다. 전날 ‘트위터 번개’로 밤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났다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이제 시작이다. 검찰의 잘못된 수사 태도 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명숙 전 총리의 금품수수 의혹이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과 관련해 “이것만으로도 검찰총장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피의 사실이 언론에 흘러나온 과정을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의 ‘진보대연합’과 관련해선 “국민참여당이 진보적 가치가 중심인 당이 된다면 얼마든지 함께 얘기할 수 있다”고 했다.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은 “대의명분이나 국민적 요구가 상당한 경우 등 특정한 조건에서 검토가 가능하다”며 ‘묻지마 단일화’에 선을 그었다.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났다. 심경이 어떤가.=그동안 (안기부 불법 도청과 삼성의 불법 자금 제공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번 판결로 무엇이 잘못됐는지가 광명천지에 드러났다. 이제 시작이다. 검찰의 잘못된 수사 태도, 관련자들의 거짓말이나 진실 앞에서 입을 다무는 일 등 잘못된 걸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17대 때 삼성 X파일 특검법과 도청 테이프 공개 특별법에 대부분 서명해놓고 자동 폐기시킨 국회도 문제다. 사법부가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검찰이 무리하게 혹은 정치적으로 수사를 한다고 느낀 적이 있나.=천정배 당시 법무부 장관이 X파일에 등장하는 검사에 대한 수사를 엄정히 하겠다고 했지만, 검찰은 형식적인 서면 조사만 했다. 당시 법무부 차관은 자신이 X파일에 들어가 있다는 걸 대검 수사관한테 들어서 알고 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그때 검찰은 X파일이 불법 도청의 결과물이므로 수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놓고 자기 식구들에겐 ‘당신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알려준 거다.
더 중요한 건 검찰이 얼마든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안 하고 덮어버린 거다. 검찰이 압수한 도청 테이프는 278개로, 1997년 대선 무렵부터 1998년 2월까지 녹음된 거다. 내가 들은 건 대선 전의 것인데, 대화를 들어보면 (돈 전달을) 계획하고 그 다음에 만나면 집행한 걸 확인한다. (내가 공개한) 떡값 검사와 관련해서도 이후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확인하면 전후 맥락이 나올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도 1998년 이후 거기(삼성) 입사해 X파일에 나온 내용대로 계속 집행을 한다고 상세히 증언했지만, 전혀 수사되지 않았다. 검찰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거대 권력의 방패나 경호대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게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다.
-노 대표는 X파일에 있는 내용을 공개했다고 기소까지 당했지만, 정작 검찰은 최근 한명숙 전 총리 금품수수 의혹을 특정 언론에 흘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검찰이 나를 기소한 이유는 내가 공개한 이름이 자기들이 감싸고 싶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검찰총장이 물러났고, 피의 사실을 사전에 변칙적·탈법적으로 공개하는 일에 지탄이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하나도 안 변했다. 검찰은 입도 없나. 그 신문은 검찰 대변인인가. 한 정치인의 정치 생명과 도덕성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사안인데, 검찰이 단지 ‘공식 발표한 적 없다’ ‘신문이 알아서 썼을 뿐이다’라는 식으로 비겁하게 발뺌해선 안 된다. 이것만으로도 검찰총장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피의 사실이 흘러나온 과정을 수사하고, (언론에 알린) 관계자가 누군지 죄를 물어야 한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 관련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만, 검찰은 여전히 구속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며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지 않을 생각임을 드러내고 있는데.=이렇게 명백한 범죄 혐의가 있는데도 수사를 안 하겠다는 건 (한 전 청장을) 보호하겠다는 건데, 아무리 ‘막가파 검찰’이라 해도 최고 권력층과 직접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면 이렇게 무리하진 않을 거다. 검찰이 수사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싶다. 검찰의 준사법권, 검찰권이 국민과 사회가 아니라 집권 세력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쓰이는 사권력이 돼가고 있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다.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이 이명박 정권 들어 더 심해졌다고 보나.=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의 자리에 검찰 독립성을 유지해 공정 수사를 할 만한 사람보다, 눈치 잘 보는 사람, 가장 말 잘 들을 사람을 임명했다. ‘정치검찰화’를 막으려면 인사부터 새롭게 해야 하는데, 지금 정부에선 누가 장관·총장이 되든 똑같다.
법원의 무죄 판결은 노 대표가 서울시장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을 치워줬다. 이로써 지난 11월29일 내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한 노 대표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게 됐다. 그는 선거 공약으로 ‘정보기본권 보장’을 내놨다. 서울시민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노 대표는 인터넷과 정보기술(IT) 분야에 관심이 뜨겁다. 일찌감치 트위터를 시작한 그의 폴로어(follower)는 1만3천 명에 이른다. 사용하는 휴대전화는 ‘좌 포도, 우 사과’다. 인터넷 이용이 편리한 스마트폰 블랙베리폰과 아이폰을 함께 쓰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 누리꾼과 소통하고 정보를 얻는다. 최근엔 사비 500여만원을 털어 중앙당 상근 당직자 23명에게 아이폰을 선물했다. 노 대표는 왜 이렇게까지 인터넷을 강조하는 것일까?
-인터넷의 자유로운 이용을 서울시장 선거 첫 공약으로 내놓은 이유가 궁금하다.=복지국가에선 인터넷 접속도 국민의 기본권이다. 샌프란시스코, 베네치아, 홍콩, 베이징에서도 시민들이 무료로 인터넷을 쓴다. 누구나 초등학교에 가야 하는 것처럼 정보기본권 개념을 우리도 도입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인터넷을 무료로 쓸 수 있는 시스템을 (전국에) 한꺼번에 갖출 수 없으니, 서울시가 먼저 하자는 거다. 인터넷 접속이 쉽고 빨라지면 소프트웨어도 발전한다.
-당직자들에게 아이폰을 선물한 이유는 뭔가.=경험 때문이다. 삼성 제트폰을 사려고 했는데, 80개국에 수출되는 휴대전화가 국내에선 시판이 안 되더라. 와이파이(근거리 무선 랜) 기능을 빼라는 이동통신사 요구 때문이었다. 이동통신사가 비싼 휴대전화 인터넷 요금제로 돈을 버는 독과점 수익모델을 고집하다 보니 무선 인터넷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고,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서 낙후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블랙베리폰을 쓰게 됐는데, 전자우편과 트위터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인터넷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소통하게 된 거다. 아이폰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컴퓨터다. 인터넷 사용이 편리하고, 일반 대중이 만든 소프트웨어까지 이용할 수 있다. 새로운 방식의 소통이 가능한 거다. 이를 활용해 진보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 아이폰 사용자 중엔 개혁 성향의 부동층이 많다. 우리가 빨리 달려가면 우리 지지층이 될 수 있다. 당직자들에게 아이폰을 사용하면서 어떻게 국민에게 더욱 다가설 수 있을지, 우리나라 IT 정책의 문제점을 직접 체험해보고 이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라는 숙제를 던져준 거다.
-왜 굳이 외국 기업의 휴대전화를 홍보하려느냐는 비판도 있던데.=아이폰의 가장 중요한 부품은 삼성이 만든다. 국산인 옴니아는 중국산 부품이 많다. 브랜드로 국적을 따지는 덴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휴대전화는 접시다. 미제 접시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접시에 뭘 담느냐가 중요하다. 아이폰이 독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약이다.
노 대표는 자신이 나설 서울시장 선거는 물론 진보신당의 지방선거 전체를 진두지휘해야 한다. 특히 진보개혁 진영에서 논의되는 반이명박 후보 단일화 전략은 지지율이 낮은 진보신당에겐 중도포기 압력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논의를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다. 노 대표는 이와 관련해 단순한 선거연합을 넘어 통합정당 구상까지 포함하는 ‘진보대연합’을 강조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진보·개혁 진영의 선거연합과 후보 단일화가 주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진보신당은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가.=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의 독선적인 국정 운영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요구는 정당하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선거에 이기려고 아무하고나 단일화하면 진보신당은 설 자리가 없다. 특히 평소에 진보신당과 민주당이 그렇게 다르다고 해놓고,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연대하는 건 우리 당의 정체성에도 맞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대의명분이나 국민적 요구가 상당한 경우 등 특정한 조건에선 검토가 가능하다. 지방선거에서 반한나라당 전선이 중요하다면, 힘있는 쪽이 양보해야 한다. 여전히 민주당은 기득권을 버리더라도 연대를 실현해 이명박 정권 중간평가를 확실히 하겠다는 말을 안 한다. 오히려 정세균 대표는 “2012년 대선을 생각하면 서울·경기·인천은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민주당의 그런 태도를 우려해 다른 정당 후보들이 먼저 단일화를 하고, 나중에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하자는 ‘단계적 후보 단일화’ 주장도 나온다.=꼭 한 가지 방침만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누가 먼저 버리느냐다. 가진 게 하나밖에 없는 집은 하나를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게 되지만, 가진 게 많은 쪽은 버릴 여지도 크다.
-지지율이 어떻게 변할진 모르지만 노 대표도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압력에 끝까지 시달릴 가능성이 높은데.=나는 한나라당을 제외한 후보 가운데 1등을 할 목표로 뛰고 있다. 내가 앞서가면 다른 분들이 압력을 받지 않겠나. (웃음) 일부 여론조사에서 내 지지율은 15%까지 나왔다. 2002년 1월 당시의 노무현 후보 지지율보다 높다. 한번 해볼 만한 조건이다. 내가 서울시장이 되면 시장이 도로 정비하고 하천 손대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바꾸겠다. 서울시장이 대통령으로 가는 정치적 징검다리나 선거운동이어선 안 된다. 일자리를 만들고 보육시설을 지어 아이를 낳고 싶게 만드는 시장,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시장, 이명박 정부에서 망가진 서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시장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가 달라졌다. 상당한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최근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지방선거 이전에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통합을 얘기하면서 일방적으로 언제까지 통합하겠다고 하나.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양당 통합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진보 진영은 진보적 가치를 중심으로 넓게 모여, 내년 지방선거에서 전면적으로 선거연합을 이루는 게 바람직하다. 그 이후 더욱 강한 진보정당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진보대연합의 의미는 지방선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실 정치세력 가운데 진보대연합의 대상은 민주노동당 말고 누구를 뜻하나.
=민주당이 진보대연합의 대상일 순 없다. 민주당 안에 진보대연합에 참여하면 좋을 만한 분이 있지만, 당 전체는 아니다. 문제는 국민참여당이다. 현재로선 판단 유보다. 과거 개혁당처럼 민주당을 개혁하는 수준이라면 곤란하다. 하지만 진보적 가치가 중심인 당이 된다면 얼마든지 함께 얘기할 수 있다.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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