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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리스트에 ‘2008 총선’ 추가요

박 회장 측근이 총선 직전 500만원 이상 제공한 정치인 6명 확인…검찰 수사 불가피
등록 2009-03-31 10:53 수정 2020-05-03 04:25

리스트 정국이다.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가 여의도 일대를 떠돈다. 70명짜리 명단이 있다고도 하고, ‘30명 버전’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검찰의 수사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이명박 정부가 드디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입을 통해 ‘친노 그룹 죽이기’에 나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면, 검찰은 거꾸로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체포했다. 한나라당 친박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면 엉뚱하게도 박진 의원(한나라당)이 소환됐다. 박 의원과 친박 그룹은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다. 언론은 ‘의외’라고 표현했다.

‘박연차 리스트’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측근들이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의원들에게 일제히 고액 정치 후원금을 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3월26일 검찰에 구속된 이광재 의원(오른쪽)과 소환을 앞두고 있는 서갑원 의원.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강재훈· 강창광 기자

‘박연차 리스트’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측근들이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의원들에게 일제히 고액 정치 후원금을 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3월26일 검찰에 구속된 이광재 의원(오른쪽)과 소환을 앞두고 있는 서갑원 의원.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강재훈· 강창광 기자

선관위 후원금 기부자 명단 보니…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조차 청와대와 검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해석’만 난무했고 ‘정보’는 부족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래서는 검찰의 칼끝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한나라당 친이계 초선 의원은 “리스트를 구해보려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 전혀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검찰이 하는 걸 지켜볼 뿐, 지금으로서는 속수무책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는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지 모르겠지만 본격적으로 파고들면 적어도 6월 말까지는 수사가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지난해에도 여야 정치인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의혹이 새롭게 제기됐다. 박 회장의 측근들이 지난해 4월9일 총선 직전 여야 정치인에게 거액의 정치 후원금을 건넨 사실이 취재 결과 밝혀졌다.

중앙선관위가 3월26일 공개한 300만원 이상 고액 후원금 기부자 명단을 분석한 결과, 박연차 회장의 측근 6명은 지난해 3월24일부터 4월7일까지 한나라당 허태열·김정권·안홍준 의원과 민주당 이강래·우윤근·서갑원 의원 등에게 적게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의 정치 후원금을 줬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허태열·김정권 의원과 민주당 서갑원 의원은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만약 박 회장 측근들이 여야 정치인에게 전달한 정치 후원금이 박 회장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이 부분에 대한 검찰 조사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은 지난 2006년에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20명에게 부인과 태광실업 임직원 명의로 1인당 300만~500만원씩 모두 9800만원을 제공한 사실이 선관위에 적발돼 기소된 바 있다. 당시 태광실업 쪽의 후원금을 받은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은 이광재·조경태·서갑원·김재윤·박병석·김종률 의원 등이다.

박연차 회장의 측근 박영석 김해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은 지난해 4월7일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에게 500만원을 냈다. 총선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2006년에도 ‘태광산업 회장’ 혹은 ‘태광실업’의 이름으로 열린우리당 박병석·김재윤·김종률 의원 등에게 고액 후원금을 전달해 문제가 된 바 있다. 이에 대해 허태열 의원실은 “후원자 명단을 일일이 확인해본 결과 누군지 모르는 사람 2~3명이 발견됐지만, 박연차 회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라고 해명했다. 역시 김해상공회의소 강복희 부회장은 3월24일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에게 500만원을 줬다. 박연차 회장은 2000년부터 최근까지 김해상공회의소를 이끌어왔다.

김정권 의원은 3월31일에도 정승영 정산개발 대표이사와 그의 동생 정아무개씨로부터 각각 500만원씩 받았다. 정승영 대표이사는 박연차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다. 정 대표이사는 2006년에도 열린우리당 유필우·서재관 의원 등에게 고액 후원금을 전달했다. 정승영 대표이사와 동생 정씨는 3월28일 김우남 민주당 의원과 안홍준 한나라당 의원에게도 500만원씩 전달했다.

이 밖에도 이강래·우윤근·서갑원 의원은 박연차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 휴켐스 직원 박아무개씨와 임아무개씨로부터 500만~1천만원씩 전달받았다.

참여정부 때의 측근 구속과 달라진 점

정치권이 ‘박연차 폭탄’을 맞을까 전전긍긍하는 것과 달리 검찰의 ‘수사 실적’은 일정한 경향을 띤다. 우선 1차적인 표적이 되고 있는 쪽은 구여권, 특히 ‘친노 인사’인 것으로 보인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구속 이후 검찰에 구속된 인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해진다.

3월17일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을 시작으로 26일 이광재 민주당 의원에 이르기까지 검찰은 열흘간 6명을 구속했다. 이 가운데 이명박 정부 인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뿐이다. 송은복 전 김해시장은 한나라당 소속이지만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는 깊지 않다. 추 전 비서관도 ‘친이 핵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추 전 비서관이 체포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그리고 박연차 회장의 사돈 김정복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이 대책회의를 열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 수사가 현 정권 인사로까지 번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천신일 회장의 이름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첫 민정수석을 지낸 이종찬 전 수석도 박 회장에게서 5억여원을 빌렸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지만, 구속과는 거리가 먼 상태다.

검찰이 추 전 비서관 구속으로 얻은 효과는 뚜렷했다. 그의 구속이 ‘야당 탄압’이라는 비판을 막는 바람막이로 작용했다. 하지만 만약 참여정부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인사가 구속됐다면, 양상은 달리 전개됐을 가능성이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참여정부 시절 정권에 참여했던 전직 청와대 인사가 구속됐다면 당장 ‘도덕성 논란’이 불거졌을 것”이라며 “이른바 박연차 로비 사건에서 현 정부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빚어지지 않는 이유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도덕성’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 일반인도 이미 충분히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검찰은 대신 비교적 친노 그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장인태 전 행정안전부 2차관을 일찌감치 구속했다. 한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이광재 의원도 두 차례 소환 조사한 뒤 구속했다. 또 다른 친노 그룹의 핵심인 서갑원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도 조만간 검찰에 불려갈 처지다.

반면 리스트에 대거 이름을 올렸던 친박 진영은 조용하다. 허태열·권경석 한나라당 의원은 일찌감치 실명까지 공개되며 금품 수수 의혹을 받았지만, 3월27일까지 소환 소식은 없다. 두 의원은 박연차 회장의 연고지인 부산과 경남에 지역구를 두고 있다. 허 의원은 “맹세코 박 회장에게서 돈을 받지 않았고, 검찰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리스트에는 이 밖에도 부산에 지역구를 둔 여러 친박 핵심 의원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 가운데 한 인사는 2006년 12월 말 박연차 회장에게서 직접 2천만원을 받았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정황까지 드러나 있지만 검찰은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다. 그 시점은 한나라당이 박 회장의 휴켐스 인수 과정에 대한 특혜 의혹을 제기한 직후다.

검찰 인사의 이름도 아직 본격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있다. 애초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부산과 경남을 거친 검찰 고위 간부 가운데 상당수도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관측됐다. 부산의 한 경제인은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1997년 부산고검 차장검사를 지내며 박연차 회장과 친분을 쌓은 케이스”라며 “2003년 박 회장의 둘째딸 결혼식이 부산 롯데호텔에서 치러졌을 때도 수많은 법조 관계자가 하객으로 참석했다”고 말했다.

실제 부산과 경남을 거친 두 명의 현직 검사장은 박 회장과 수시로 골프 모임을 갖고 술접대를 받는 등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두 사람의 이름을 3월27일까지 거론하지 않았다.

3월 말 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박연차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은 4월 국회가 시작되면 다소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4월 회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현역 국회의원에 대한 소환 조사 등이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4월29일 재보선이 예정돼 있다.

가장 크게 웃는 건 청와대

다만 지금까지의 수사만으로도 여야, 그리고 청와대의 손익은 뚜렷해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검찰 수사와 청와대의 의중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가장 웃고 있을 쪽은 청와대다. 야당과 ‘여당 내 야당’으로 불린 친박 진영은 물론 친이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충성도가 약한 그룹에 ‘박연차 리스트’라는 확실한 ‘카드’를 보여준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연차 리스트’는 해당자의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까지는 두고두고 ‘재활용’할 수 있는 카드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른바 친이 핵심과 현재 거론되는 검찰 관계자에 대한 수사도 공평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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