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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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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보다 배꼽이 큰 ‘배소주’

MB의 숨은 작품 빛바래…쌀국수도 농가 아닌 업체만 배 불려
등록 2008-11-21 11:37 수정 2020-05-03 04:25

조만간 배로 만든 ‘배 소주’가 시판된다. 유례없는 대풍으로 버려질 예정이던 배를 재활용한 술이다. 배 소주를 만든다는 사실은 지난 11월10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밝혔다. 배 소주가 만들어진 경위를 따지자면, 공개는 청와대에서 했어야 한다. 배 소주는 이명박 대통령의 ‘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10월 과잉 생산으로 배 1만t을 산지에서 폐기한다는 보고를 받고 “활용할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멀쩡한 것을 버리는 것을 못 보는 이명박 대통령의 검소함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실과 농식품부는 고심을 거듭하다, 배를 주정(酒精·알코올 농도 95%인 원액)으로 활용한 술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정부의 제안을 진로 등 소주업체들이 받아들여 배 소주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주류업계에서 사들이기로 한 배는 모두 1천t. 버려지는 배의 10%다. 이는 주정 4만5천ℓ를 만들 수 있고, 여기에 물을 타면 알코올 농도 20%인 소주 59만 병(360㎖ 기준)이 된다고 한다.

칼국수를 먹는 이명박 대통령. 어려운 초년 시절과 바쁜 기업인 시절을 보낸 이 대통령은 서민적이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칼국수를 먹는 이명박 대통령. 어려운 초년 시절과 바쁜 기업인 시절을 보낸 이 대통령은 서민적이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알려진 ‘국순당’의 배상면 전 회장도 경기 수원 지역 과수원의 낙과 배(떨어져 못 쓰는 배)를 재활용해 43°짜리 배 주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잉 생산 배 활용방안 연구 지시

‘MB표 상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5월 이후 출시된 MB표 ‘쌀라면’과 ‘쌀국수’가 있다. 이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이던 지난 1월 “비싼 밀가루를 쌀로 대용할 수 없는지 연구해야 한다. 동남아에서도 쌀국수를 먹는데 우리만 밀가루 국수를 먹느냐”고 말했다. 농어업단체 대표들을 만난 자리였다. 농식품부는 출범 이후 ‘경쟁력 있는’ 쌀라면과 쌀국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농식품부는 지난 5월부터 쌀라면과 쌀국수를 만들겠다고 신청한 27개 식품업체에 쌀을 공급하고 있다.

이 쌀이 수입 쌀이란 점이 문제다. 농식품부는 지난 5월 국수용 수입쌀 4천t을 정상가(kg당 656원)의 절반 수준인 kg당 355원에 공급했다. 이 대통령이 지시한 것은 국산 쌀 활용 방안이었을 것이다. 농어업단체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린 지시였다는 점에 비춰보면, 당연히 국내 농가 살리기 대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작 혜택을 본 것은 쌀 수입업체와 정상가의 절반가에 원료를 공급받은 식품업체였다.

국산 쌀로 만든 쌀국수도 있긴 하다. 경기 여주군에 있는 한 쌀 가공업체가 지난 6월부터 여주쌀로 만든 10여 종의 쌀국수 즉석 컵라면을 출시하고 있다. 이 제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쌀 가공식품 원료는 수입 쌀이다. 국산 쌀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국산 쌀로 가공식품을 만들라는 대통령의 아이디어는 경제성과는 무관한 발상이었던 셈이다.

남는 농산물 북한에 보낸다면

배 소주도 ‘경제성’에서는 문제다. 는 11월11일치에 배 소주 출시 사실을 보도하면서, 수입 주정 원료에 비해 주정용 국산 배 공급 가격(t당 4만5천원)이 1.6배가 넘기 때문에 업체로서는 손해를 보는 셈이라고 보도했다. 기업이 배 재배 농가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란 결론이었다. 이왕 경제성과는 동떨어진 발상이라면, 남는 농산물을 만성부족 상태인 북한에 보내는 것은 어떨까. 언제 어디서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쪽이 ‘구세주’인 법이니.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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