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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도 클린턴도 재협상 제기하는데…”

등록 2008-02-29 00:00 수정 2020-05-03 04:25

‘FTA 저지를 위한 단식 농성 9일째’에 만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군용 담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강기갑(55) 의원은 녹색 도포 차림이었다. 얼굴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책상으로 쓰이는 옻칠 앉은뱅이 밥상 앞에 마주 앉자 뒤편으로 흰색 바탕에 써내려간 굵직한 글귀가 엿보였다. ‘한-미 FTA 비준 동의안 2월 국회 처리 저지를 위한 단식농성 9일째’. 같은 내용의 글귀는 바로 옆에 자리한 세종대왕상 옆에도 붙어 있었다.

쇠고기 문제도 물고 늘어져 공론화돼

강 의원이 국회 본관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한 것은 2월12일이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위원장 김원웅)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상정하려다 강 의원을 비롯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통외통위원장실 점거로 무산된 날이었다. 통외통위는 이튿날 상임위 회의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개최한 전체회의에서 비준안을 상정한 터다.

강 의원은 2004년 국회 진출 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단식을 감행했다. 첫해에는 민주노동당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이라크 파병 반대를 위한 단식 농성에 동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국회에서 쌀 개방 전면 재협상을 촉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2005년에는 쌀 개방 협상 국회 비준 저지를 위해, 2006·2007년에는 한-미 FTA 졸속 협상을 문제 삼아 단식 농성 행진을 이어갔다. 단식에 그렇게 이골이 나서였을까. 단식 9일째임에도 표정은 담담해 보였다. 그는 “4, 5일째가 힘들고 면역이 생겨서인지 그 뒤부터는 별로 힘든 줄 모른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국회의원 1명의 단식으로는 거스르기 힘들 정도로 한-미 FTA는 너무 큰 대세로 여겨진다. 단식 농성에 돌입해 있는 당사자도 그런 막막함을 떨치기는 어렵지 않을까?

“단식을 하는 방식으로라도 농어민, 소외 계층을 대변함으로써 정치권이 타성적인 관행에서 벗어나고 각성을 하게 하는 역할은 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농민이나 소외 계층이 선거 때는 (보수 정당에) 표를 몰아주고, 선거 뒤엔 또 속았다고 배신감을 토로한다. 현장에 가면 정치인들 다 도둑놈들이라고 노골적으로 욕한다. 농업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 몸을 던져 의정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작으나마 정치 불신을 줄이고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강 의원은 단식 같은 방식의 저항을 통해 실질적인 효과를 일부 거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한-칠레 FTA 헙상 때 몸부림을 쳐서 그나마 무심히 넘어가지 않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협상에서 쉽게 내주는 일은 막았다.” 한-미 FTA와 긴밀하게 얽힌 쇠고기 수입 문제도 그런 예로 들었다. “상임위가 열릴 때마다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고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언론을 비롯한 바깥 사회의 조명을 받고 시민단체들과 연계해 선적 중단 조처를 이끌어냈다. 단식을 해봐야 뭣하냐는 식은 너무 평가절하하는 거다.”

인터뷰 도중 보좌관을 통해 ‘한-미 FTA 2월 처리 무산’이라는 요지의 기사가 전해졌다.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비준 동의안을 놓고 협상을 벌였지만, 민주당 쪽의 반대로 2월 국회 처리는 불가능해졌다는 내용이었다. 단식에 나서며 내건 1차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강 의원은 그럼에도 2월 임시국회 종료일인 26일까지 단식 농성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적인 졸속 처리를 막기 위해서다.

거부보다 협상 보따리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미 FTA 비준안 처리가 2월을 넘겼다고 해서 반대 진영에 숨통이 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FTA를 더 열렬히 찬성하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데다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준안 찬성 처리는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국회 통외통위는 2월18일 내놓은 한-미 FTA 비준안 검토보고서에서 “자동차 협상 결과에 헌법을 어기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우리 경제에 득이 많다는 평가를 내렸다. 반대 진영의 목소리는 ‘개방 대세’에 묻혀 있다. 유력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까지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입장과 재협상 필요성을 강도 높게 제기하는 미국 정가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미국 쪽의 반대 분위기는 섬유나 자동차 부문의 노동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데서 나오는 거다. 여기에 금융, 농업, 각종 서비스 분야에선 미국에 유리함에도 이익은 재계 쪽에만 국한되고 노동자, 서민들에게 재분배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에도 FTA에 따른 양극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표는 노동자, 서민들에게 많이 나오는 거니까.”

우리나라 국회는 미국 의회와 달리 행정부의 통상 협상에 대해 제대로 검증을 하지 못하고 거수기나 시녀 노릇만 일삼고 있다고 강 의원은 한탄했다. “정부에서 ‘포장’은 잘 해놓았지만, 철저하게 미국 쪽의 요구가 관철된 협상안이다. 그 안에는 유리 조각이나 바늘, 돌멩이도 들어가 있다. 독소조항들이 많다.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은 환경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입법인데 미국에 다 내주고 쇠고기를 비롯한 4대 선결조건을 들어주고 협상을 했다. 미국산 수입 농산물의 55%(수입액 기준)는 즉시 관세 철폐하도록 돼 있다. 이래선 농업을 지킬 수 없다. 내용으로 보아 한-미 FTA는 저지해야 마땅하다.”

강 의원도 무조건 저지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대세는 인정한다. 국회에는 한-미 FTA 비준안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 이상으로 찬성 목소리가 높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강 의원은 따라서 “두 나라 정부 사이에 체결된 협상안이 국회로 넘어온 지금 단계에선 거부보다 국회에 온 보따리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통외통위원장실을 점거하는 식의 물리력은 그 일환이었다고 강조했다. “통외통위 차원에서만 수박 겉핥기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나라 행정부가 17개 분과로 나눠 협상을 진행한 걸 통외통위에서만 다룬다는 건 무리다. 의료 문제는 보건복지위에서, 농촌·농업 문제는 농해수위에서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반대’보다 ‘대책’이 필요하다고들 얘기하는데, ‘검증’ 없이 어떻게 대책이 나오나. 대세니까 무조건 비준하고 대책을 세우자? 그래서는 피상적인 대책밖에 나오지 않는다.”

총선 경남 사천서 이방호 의원과 대결

강 의원을 만난 날에도 민주노동당은 분열의 파열음으로 요란했다. ‘노동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단병호 의원이 이날 탈당을 선언했다. 강 의원은 “안타깝다”고 했다. “민노당이 너무 앞서나가며 국민들보고 따라오라고 손짓했지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손잡고 같이하지 못한 것 같다”고도 했다. 강 의원은 그러면서도 탈당파의 종북, 친북 주장은 과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단에는 자주파니 평등파니 하는 구별과 구분은 애초 없었는데, 대선에서 실패해 지지 기반을 잃으니 탈당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을 지키는 쪽에 선 강 의원은 4월에 치러지는 18대 총선에 경남 사천의 지역구 출마를 결심한 터다. 농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의정활동의 필요성을 더 절감해 농사를 짓고 싶은 개인적인 희망은 접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상대는 이명박 정부의 실세로 꼽히는 이방호 한나라당 의원이다. 너무 힘겨운 상대 아니냐는 물음에 강 의원은 “내가 강한 사람에겐 강하다, 그래서 강기갑 아니냐”며 “당으로는 게임이 안 되지만, 농민을 대변하는 강기갑의 인지도와 민심이 바닥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강 의원이 단식 9일째를 맞은 2월20일 국회 앞마당은 새 대통령 취임식 준비로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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