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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을 넘어 화합하는 성추행 국회

등록 2006-12-29 00:00 수정 2020-05-03 04:24

의원·보좌관들의 상습적인 성범죄에 시달리는 국회 여직원들…의원이 모든 인사권을 쥔 권력구조에서 문제제기 하기도 힘들어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여기자 성추행, 술집 여종업원 동영상 파문, 성폭행 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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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사건기록부가 아니다. 올해 터진 정치인들이 관련된 ‘성범죄 사건’들이다. 최연희 의원, 박계동 의원, 충청 지역 당원협의회장(옛 지구당위원장)이 그 주인공들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한나라당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 재소자 비하나 성매매와 관련된 ‘사고’ 발언도 대부분 한나라당발이니 ‘성추행당’이라고 공격을 당해도 싸다.

“스웨터나 사입으라” 30만원 건네

그런데 꼭 한나라당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최 의원 사건 직후 일부 남성 의원, 보좌관들 사이에서는 ‘동정론’이 일었다. “남자가 술을 마시면 그럴 수도 있지”라거나 “재수가 없었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한광원 열린우리당 의원도 “아름다운 꽃을 보면 다가가서 만져보고 싶은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글을 썼다가 곤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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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법이 만들어지는 공간이고 그 안에는 높은 도덕성으로 무장한 이들이 일하고 있을 것 같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자 성추행, 성폭행 미수처럼 공론화되지 않은 무수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했다. 남성 중심주의적이고 권위적인 문화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속살이 곪고 있었다. 명백한 성희롱,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남성들이 득실대는데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도록 법으로 정한 국회는 이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국회에서 몸조심 해야 할 듯싶어요. 전 의원님껜 아니지만 다른 방 보좌관님께 당할 뻔했어요. 이럴 땐 남자였음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국회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한 여성이 지난해 7월11일 ‘대한민국 국회 인턴 커뮤니티’라는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또 다른 인턴은 과의 전화 통화에서 “얼굴 예쁜 여자 비서나 인턴은 술집 작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처음엔 설마했다. 사실이라고 해도 과장이 섞여 있기를 바랐다. 한 여성 인턴에게서 실상을 들어봤다. 인턴은 주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뒤 각 의원실의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 면접을 거쳐 채용된 뒤 보좌관·비서관들과 함께 일하고, 일을 잘하면 비서나 비서관으로 채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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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보좌관들의 술자리에 동석했는데 술을 따르게 됐어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을 때라 윗사람이 시키면 다 해야 하는 줄 알았죠. 한 잔, 두 잔 따르다 보니 그 보좌관이 점점 더 심한 행동을 했어요. 참다 못해 도망치고 말았죠.”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인턴은 보좌관이 어떻게 성추행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꺼렸다. 떠올리기 부끄럽다고 했다. 신분이 드러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여비서의 경험담은 더 충격적이었다. “의원의 후원회장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원회장이 제 엉덩이를 쓸고, 허벅지에 손을 넣으면서 ‘스웨터나 사 입으라’며 30만원을 줬어요. 어찌나 수치스럽던지…. 하지만 후원회장은 지역 유지인데다 의원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이렇다 할 항변도 못했어요.”

성희롱 예방 교육, 있기는 한데…

여비서가 의원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나서, 의원이 비서에게 사표를 쓸 것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다. 한 의원실의 비서는 “17대에 비서와 연인 사이라는 의원들이 내가 아는 것만 10명이 넘는다”며 “이상한 소문이 나면 늘 비서가 쫓겨난다. 이런 의원들과 마주치면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회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은 성범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지만, 황당한 일을 겪게 되더라도 피해 여직원들이 참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추행을 당한 인턴도 “승진하고 싶어서 꾹 참고 있다”며 “예전에는 최연희 사건 같은 게 일어나면 흥분했는데, 이제는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뭐’ 하며 웬만한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쉬쉬하고 넘어가거나 피해 여성들이 삭히고 넘어가는 데는 국회의원 보좌진 인사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국회의원실은 작은 중소기업과 같다. 의원은 사장이고 모든 인사권을 갖고 있다. 보좌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다. 정무직 공무원이라지만 ‘파리 목숨’이다. 고용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직급이 낮은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또 의원이나 급수가 높은 보좌관들과 여성 비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학연·지연 등 인맥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잘못 찍히지 않도록 상사에게 순종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일반 기업체의 피고용자들에 비해 훨씬 불리한 구조다. 게다가 국회에는 피해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여명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위계질서에 의해 수직적 문화가 농후한 곳에서 성폭력이 많이 일어난다”며 “가해자의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성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에 성희롱 예방 교육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국회 사무처 교육훈련과 주최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고 있기는 하다.

국회의원이나 보좌진들의 참여율은 얼마나 될까. 성희롱 예방 교육을 담당하는 국회 관계자는 “솔직히 의원들은 교육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우리도 의원 참여율에 대한 통계를 따로 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기관은 여성발전기본법 제17조 2항에 의거해 성희롱 방지를 위해 교육을 하고 그 결과를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제출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 여성가족부에 확인한 결과 국회사무처, 국회도서관 등의 직원들은 성희롱 예방 교육의 참여율과 결과를 여성가족부에 보고하는 반면,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의 참여율은 따로 통계를 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 여직원들의 인식 전환 필요

성희롱 예방 교육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국회의원이 받는 불이익은 전혀 없다. 교육에 참여해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것이다. 여성가족부 성희롱 예방팀의 김행미씨는 “행정부가 국회의원의 성희롱 예방 참여를 강제하기는 어렵다”며 “국회의원의 성희롱 예방 교육에 관해서 우리도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국회, 특히 의원회관 주변의 성범죄를 막으려면 유명무실해진 성희롱 예방 교육이 내실 있게 진행되고 성범죄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지만, 무엇보다 여직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직원은 “여성 스스로가 성폭력과 차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국회 여직원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주문했다. 불합리한 것에 대해 여성 스스로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은폐된 최연희 사건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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