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억 주면 팔겠다” 터무니 없는 가격 부르는 주인 때문에 생가 포기… 어쩔 수 없이 뒤편 산부지에 한옥집을 지어 퇴임 뒤 거처 마련할 계획
▣ 김해=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좀 덜 바쁘게, 조금 느리게 천천히 살고 싶다.”
지난 10월1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전원마을 페스티벌 개막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귀향의 꿈’을 이렇게 밝혔다.
퇴임 뒤 이어지는 ‘생가의 정치’
10월24일 기자가 찾은 노 대통령의 고향,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은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알알이 여문 곡식과 과수원에 주렁주렁 달린 감들로 마을의 가을 풍경은 풍요로웠다.
그러나 평화로운 마을 모습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의 ‘귀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조용하지 않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퇴임 뒤 고향에 돌아온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도 당시 정치 상황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귀거래사’는 퇴임 뒤 정치 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대통령의 ‘고향’은 지역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한국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히 전·현직 대통령이 태어난 집, ‘생가’(生家)는 정치적으로 의미가 크다. 정치 지망생들이나 유력한 대선 주자들이 전직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하는 게 화제가 되는 것도 생가가 갖는 정치적 상징성과 영향력 때문이다. 서울 안국동에 사무실을 여는 등 본격적인 대선 준비 행보를 시작하던 8월 말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에 대한 열정을 알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한나라당 의원들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에서 “DJ는 민주화와 남북통일의 물꼬를 튼 어른”이라고 치켜세워 호남의 민심을 얻으려고 애썼다. 생가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생가는 곧 대통령이자, 대통령의 정치적 지역 기반을 상징한다.
‘태어난 곳’이라는 개인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퇴임 뒤에도 정치 생명을 잇는다는 점에서 대통령들은 생가에 더욱 애착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의 생가는 대통령 측근이나 고향의 지역사회 차원에서 복원됐거나 복원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는 경남 거제시가 시 예산 5억원을 들여 2001년에 완공했고, 사업비 26억원을 들여 김 전 대통령의 기록 전시관도 건립할 예정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가 복원 상량식 때 자신이 붓글씨로 직접 쓴 상량문을 보내 생가에 대한 강한 애착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박준영 전남지사가 국민 성금과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김 전 대통령 기념관을 목포에 세우는 것을 계획 중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는 지난해부터 아산시에서 대대적으로 정비해 관광자원 활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대통령 낳은 터, 10억도 안 비싸다”
그러나 ‘생가의 정치’에도 예외가 생길 것 같다.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는 복원하기가 어렵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당시 경남지사였던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은 행정적으로 생가 복원을 도와주겠다고 얘기했으나 노 대통령이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형 건평(64)씨를 비롯해 ‘광주 노씨 종친회’가 생가를 매입하려고 했지만 집주인인 하아무개(69)씨 부부가 “20억원을 주면 팔겠다”고 말해 가격이 비싸 사들이지 못했다. 봉하산 아래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는 노 대통령이 태어나서 7살 때까지 살았다.
노건평씨는 10월25일 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집주인이 20억원을 불러서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한 5억원 정도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집을 구입할 생각도 있었지만 집주인이 안 된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말했다. 생가 안주인 김아무개(61)씨는 “(노씨 종친회 쪽에서) 자꾸 물어서 그냥 20억원을 달라고 말한 적은 있다”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10억원 정도면 집을 팔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 요구했던 가격보다 낮게 부른 것이다.
이에 대해 진영읍의 한 부동산 사장 김아무개씨는 “450평을 2억원에 팔아도 충분히 좋은 가격을 받는 것”이라며 “10억원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생가 주인은 “대통령을 배출할 정도로 터가 좋은 곳이기 때문에 비싸지 않다”는 입장이다. 결국 노 대통령 쪽은 생가를 사지 못하고 생가 뒤편 야트막한 언덕배기 터를 구입했다. 이곳은 노 대통령의 후원자인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의 최측근으로 태광실업 계열사 대표를 맡고 있는 정아무개(56)씨 명의의 본산리 산 일대이다.
노건평씨는 “땅 1297평을 계약금 5천만원과 2억여원(1평당 15만원)을 주고 20일에 계약했다”고 밝혔다. 집터는 10월19일부터 인부들을 동원해 폐가 두 채를 헐고 소형 포클레인으로 감나무를 파낸 상태이다. 노씨는 “자연친화적인 1층 한옥 집과 작은 병원을 지을 계획이고, 2007년 초에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가 같은 해 연말까지 완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거처할 또 다른 유력한 후보지였던 마을회관 옆 400~500여 평 대지는 경호원 숙소로 건설될 예정이다. 경호원 숙소는 노 대통령 퇴임 뒤 거처할 예정지와 100m 남짓 떨어져 있고 노건평씨 집과도 가깝다. 국고가 지원되는 경호원 숙소 건축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비용은 노 대통령 개인 돈으로 충당한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의 귀향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형 건평씨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다. 그는 “생가를 사서 직접 관리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지쳐서 생가에 대한 기대를 버렸고 아예 체념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생가 주인이 볼일 보러 나가면 문을 닫는데, 그럴 때마다 멀리서 생가를 보러 온 관광객들이 허탕치고 돌아서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아쉬움을 남겼다. 2003년 1월부터 생가를 소개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김민정씨는 “노 대통령의 생가를 구경 온 관광객들은 평일에는 70~100명, 주말에는 400~500명 정도 된다”고 말했다.
생가 관광객, 주말엔 400명
그렇다고 해서 시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생가를 팔려는 고향 아주머니에게 “이쯤 가면 막가자는 거지요”라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를 너무 제대로 실천한 탓인지, 임기 말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은 탓인지 촌로 앞에서 쩔쩔매는 대통령은 더 이상 권위와 권력의 상징일 수 없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적으로 변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흔적이 없는 대통령 생가에 정치인들이 정략적으로 방문하는 풍경은 노무현 대통령 생가에서는 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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