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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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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뻔뻔한 침묵

등록 2006-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성추행 혐의 최연희 의원·공천 헌금 받은 김덕룡 의원 슬며시 귀환… 유명무실한 윤리특위와 낮잠 자는 국회법 개정안이 도덕불감증 키워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대답할 일이 없습니다.”(무소속 최연희 의원)

“의원님과 인터뷰가 불가능하고,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한나라당 김덕룡 의원 보좌관)

최연희 의원과 김덕룡 의원이 장기간의 공백을 깨고 국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이들은 말이 없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기자가 애써 준비한 인터뷰 질문들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9월20일부터 의정활동을 재개한 최 의원은 여기자를 성추행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양 “(성추행한 사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김덕룡 의원은 지난 4월 부인이 5·31 지방선거 공천 헌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의원총회에서 “정치, 도의적 책임을 다 지겠다”며 정계 은퇴를 시사했다. 그러나 김 의원도 자신이 한 말을 잊은 듯 북핵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0월10일부터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북핵이 의원들의 기억력을 감퇴시킨 것일까? 도덕적으로 심각한 흠결이 있는 의원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업무를 보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 “술이 원수”…

이는 의원 개개인의 ‘뻔뻔함’도 문제지만 이를 용인하는 정치권의 ‘도덕불감증’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의원들 사이에서 김 의원에 대한 동정심이 있고, 의정활동에 비판적인 견해보다는 긍정적인 견해가 많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자연스러운 현상 아니냐”며 김 의원의 컴백을 당연시했다. 최연희 의원에 대해서도 “술이 원수”라며 “그 정도 자숙했으니까 이해해줄 만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의원들의 비윤리적 행위를 규제할 구체적인 장치가 없는 것도 정치인의 도덕불감증을 더 악화하고 있다. 국회법 제155조 2의 1은 ‘청렴의 의무 규정에 위반하는 행위를 한 때, 윤리특별위원회(이하 윤리특위)는 의원을 징계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청렴의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이 없다. 현행 국회법으로는 그들을 징계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김덕룡 의원은 윤리특위에 제소조차 되지 않았고, 최연희 의원은 성추행 혐의가 국회 활동과 무관하다고 해서 ‘징계심사’가 아닌 ‘윤리심사’에 회부됐다. 윤리심사에서 잘못이 인정되더라도 윤리특위의 경고 정도로 끝나기 때문에 의원의 비도덕적 행동을 규제하는 데 별 효과가 없다.

그래서 여성계는 3월22일 국회의원 징계 사유에 ‘인권 관련 범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외부 인사로 구성된 윤리조사위원회 설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국회법 개정 국민청원안’을 국회에 전달했다. 그러나 청원안은 제출된 지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상민 의원은 “의원들이 자신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커지는 국회법 개정을 꺼린다”며 국회법 개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유명무실한 윤리특위도 의원들의 ‘도덕불감증’을 키우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의원들의 윤리와 자격을 심사해야 하는 윤리특위가 심사는커녕 제대로 회의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윤리특위에 제소하는 것을 상대 당 의원을 공격하는 당쟁의 수단으로 삼거나, 소속 정당의 의원이 제소되면 ‘제 식구 감싸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회의에 불참하는 등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윤리특위 소속 강기갑 의원(민주노동당)은 “윤리특위에서 회의가 제대로 열린 기억이 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2005년 7월 이후부터 2006년 9월까지 제소된 윤리심사안 16건 중 2건을 제외하고 모두 심사 기간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16건 중 14건의 윤리심사 자동 폐기

국민들이 돌아온 이들의 ‘뻔뻔한 침묵’을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북핵 위기가 그들에게 컴백 기회가 됐지만,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오히려 강력한 ‘여론의 핵’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의원들의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그들 자신은 잊었을지 몰라도, 국민들은 온전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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