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대로 두 대선주자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한나라당 전당대회… 강재섭와 이재오 중 누가 대표 돼도 불신과 당내갈등 피할 수 없어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걱정했던 대로다. 한나라당 내 불신이 팽배하다. 7월11일 전당대회(전대)에서 공정한 대선 관리인을 뽑아야 한다는 기대는 물 건너갔다. 8명의 당 대표 후보들은 이편 저편으로 갈렸다.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리전이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전대가 가까워지면서 물 위로 떠올랐다.
친박계열 “이재오에 표 주지 말자”
7월6일 김무성·유승민·유정복·유기준·곽성문·엄호성 의원 등 친박(박근혜와 가까운) 의원 9명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바로 앞 일식집에 모였다. 대책회의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전 시장이 이재오 의원을 너무 노골적으로 밀어준다고 성토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재오가 되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결론으로 입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구체적인 지침까지 나왔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일단 강재섭에게 한 표, 나머지 한 표는 전여옥·강창희·이규택 의원 등 ‘비슷한 성향’의 인물에게 몰아주기로 했다. 경기는 이규택, 부산은 정형근, 서울은 권영세 등에게 한 표를 주되 1인 2표의 다른 한 표가 절대 이재오에게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이 전 시장 쪽이 ‘묵계’를 깨고 직접 나섰다고 날선 반응을 보였다. 이 전 시장이 6월28일 를 통해 당 대표감으로 “‘야성’(야당 성향)을 가진 사람” “개혁 성향을 가진 지도자”라고 발언한 것은 이재오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무대 뒤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 전 시장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먼저 넘었다고 주장했다.
모임이 끝난 뒤 유승민 의원은 의 “대책회의가 박 전 대표의 의중이 실렸다고 봐야 하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대표하고 최소한의 교감은 한다”고 밝혔다. 유기준 의원도 “(모임에) 나온 사람들이 박 진영의 핵심들이다. ‘박심’이 좀 전달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친박의 대응과 전략이 박 전 대표와의 공감 아래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날 이 전 시장의 핵심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저쪽에서 (뭔가) 안 할 수 없게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빚어진 이와 박 진영의 충돌은 불과 2~3주 전 “대리전은 안 된다” “철저하게 중립이다” “나서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물렸다. 이재오와 강재섭의 감정 대립은 금세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립으로 번졌다. 그리고 약속이 깨진 이상 자신의 이익을 대리해줄 수 있는 인물을 대표로 만드는 데 ‘올인’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론이 지배했다.
애당초 갈등이 내재돼 있었지만 이재오 의원에 대한 색깔론 시비가 대리전에 불을 붙였다. 보수우익 단체인 국민행동본부가 에 낸 “한나라당은 좌파 종식 투쟁 선봉장을 뽑아라”라는 제목의 광고에서 “공산혁명 조직 남민전 사건 관련자 이재오 후보는 전향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규택 후보는 후보 합동토론회 등에서 이 의원의 전향 여부를 밝히라고 거듭 촉구하면서 이 의원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쏘아올린 미사일마저 이재오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었다. 사상 검증이란 구태와 ‘신북풍’이 보수적인 한나라당 당원들과 대의원들에게 어느정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보 간 짝짓기도 대리전을 강화하고 확전시켰다. 강삼재·정형근·이규택·전여옥·강창희 후보 등 범친박 진영이 연대를 형성했다. 여기에 이재오 의원과 사이가 틀어진 김덕룡 전 원내대표가 강재섭 후보 쪽에 힘을 실어줬다. 줄서기에 반대하며 당의 변화와 쇄신의 기치를 내건 미래모임(간사 박형준 의원)조차 대리전의 공간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다. 유승민·유기준·엄호성·곽성문 의원 등 친박 의원들이 상당수 가입하면서 박근혜 전 대표와 대립각을 세운 “남경필 의원이 미래모임의 단일 후보가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정두언 의원)는 의혹이다. 정 의원은 “문제는 거기서부터 출발됐다”고 말했다.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이재오 후보는 이와 박의 대리전이 본격화하면서 강재섭 후보와의 격차가 예측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좁아졌다. 이제 문제는 이재오나 강재섭 둘 중 누가 당대표가 되느냐가 아니다. 후유증에 있다. 김정훈 의원은 당 최고위원·주요당직자 연석회의에서 이런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너무 각 계파별로 지나치게 과열되어 전대를 치르는 것은 한나라당이 내년 대선을 승리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대선 후보 경선 전에 대표를 다시 뽑아야 할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이재오나 강재섭 둘 가운데 누가 당 대표가 돼도 이명박과 박근혜 어느 한쪽은 당 대표를 신뢰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이재오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 쪽과의 불신은 너무나 크다. 친박 의원들은 이재오와 박근혜를 화학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다른 성분으로 여긴다. 유기준 의원은 “이 의원은 박 전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한 분이다. 그런 생각이 2~3년이 지났다고 변할 수 있겠나? 변했다면 변한 대로 문제고, 변하지 않았다면 같이 할 수 없다. 이 의원은 늘 (이명박의) 대리인이었다”고 말했다. 반대로 이명박 전 시장 쪽에서도 강재섭 대표에게 신뢰를 전혀 보낼 수 없게 됐다. 상황은 단순히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을 넘어 상대 대리인이 내년 상반기 치러질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공정하게 관리할 수 없다는 불신으로 번졌다.
변화와 쇄신의 모습 보여주지 못해
따라서 대리인을 대표로 만들지 못한 한쪽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공정하지 않은 심판을 ‘비토’할 수도 있다. 물론 사실상 집단지도 체제의 성격이 짙은 최고위원회에서 자신을 대리할 최고위원을 통해 어느 정도 의사를 반영할 수 있겠지만 예상대로 친박 후보들이 다수를 점한다면 이 전 시장 쪽은 초조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낮지만 전대 결과가 이 전 시장 쪽으로 힘이 모인다면 이번엔 박 전 대표 쪽이 불안하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세력균형이 필요하다. 이러한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당내 갈등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폭발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이번 전대에서 두 가지를 보여줬다. 하나는 전대를 여전히 낡은 정당이란 이미지를 벗기 위해 변화와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회로 활용하지 못한 점이다. 환골탈태를 통해 집권을 위한 외연을 넓힐 찬스를 그냥 날려버렸다. 대권 후보 대리인 선출에 함몰됐다. 불순물이 섞이긴 했지만 미래모임은 흥행을 연출하지 못했다. 특히 선거 과정에서 수면 위로 올라온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립과 갈등이 쉽게 조정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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