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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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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냐 대중성이냐

등록 2006-06-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표’를 전혀 끌어오지 못한 민주노동당의 고민… 원론 수준 해결책만 되풀이… 대선까지 남은 1년반에 당 운명 걸렸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보세력 교체’ ‘정당 지지율 15%, 300만 표 확보’라는 민주노동당의 야심에 찬 5·31 지방선거 목표는 무참하게 좌절됐다. 민주노동당 공동선대위원장이었던 천영세 의원은 “열린우리당을 찍으면 사표”라고 주장하며 민주노동당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표심’을 끌어오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대 이하의 성적에 민주노동당은 내심 당황하는 눈치다. 겉으로는 ‘정당지지율 12.1%, 당선자 수 81명’이면 나쁜 성적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있지만, 378명 당선자를 낸 민주당에 비해 크게 처지는 것은 물론 89명을 당선시킨 국민중심당보다 못한 성적이다.

특히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표가 민주노동당으로 오지 않았다는 점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대중정당으로서 발돋움하기가 녹록지 않다는 현실의 벽과 민주노동당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당의 한 보좌관은 “무능한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국민들의 ‘선택 리스트’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민정당의 업적 무엇을 남겼나

김은진 최고위원은 6월8일 열린 ‘5·31 지방선거 평가 워크숍’에서 “대중에게 민주노동당은 정당으로 보이지 않고, 당 스스로 대국민 정치를 할 수 있는 객관적인 당력도 많이 부족하다”며 패인을 분석했다. 노회찬 의원도 “예전에 비해 당 활동에 쓰는 돈과 인력, 언론 노출도가 크게 늘었음에도 지지율이 똑같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5·31의 패인은 지난해 10·26 재선에서 울산 북구를 내준 뒤 당 안팎에서 쏟아져나온 진단과 기실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문제점들의 강도가 더 세지고, 그 짧은 사이 더 고착화됐다는 점이다.

지난 4·15 총선을 통해 국회에 등원할 수 있었던 힘인 기성정당과 다른 신선함, 참신함의 ‘약발’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고 있다. 또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진보개혁 세력 전체로까지 퍼져 민주노동당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역주의 정치가 여전히 현실 정치의 판을 가르는 힘으로 작용하는 상황도 진보정당이 성장할 수 없는 외적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민주노동당 스스로에게 있다는 점이다. 서민 정당을 표방하고 있지만 서민들을 위해서 이렇다 할 만한 구체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노회찬 의원은 “서민 정당인데 서민들의 지지를 못 받고 있다. 서민들에게 감동을 줄 만한 일을 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지지자들에게 군소정당으로서 힘이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정규직 노동자, 대추리 등 현안에 대해 가시적 성과를 떠나 민주노동당이 제 몫을 충분히 해냈다고 보기 어렵다. 당이 국민들의 요구와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는 비판의 연장선이다.

이제 민주노동당 하면 서민 정당이라는 이미지보다, 민주노총이 떠오르는 계급정당 이미지로 굳어진 것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용대 정책위의장은 “‘민주노총당’이라는 이미지를 전환해 광범위한 계층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대중정당으로서의 한계’와 서민들을 위한 정당으로서 당의 노력과 역량이 부족했다는 문제의식은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그래서 당을 쇄신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위기감도 뼈저리다.

그럼에도 문제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당의 대중화는 곧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상정 의원은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서 잎만 무성하면 문제”라고 말했다. 어설프게 국민정당을 표방하다가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것은 물론, 당의 중요한 지지 기반인 노동자와 민주노총마저 당을 버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성희 부대변인도 “외연을 넓히려다 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다. 자칫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이 섞인 열린우리당처럼 분란이 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중성과 정체성 강화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없다”

또 자주파(NL)와 평등파(PD) 등의 해묵은 노선 갈등과 각 계파를 바탕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는 당의 구심력을 모을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구조로 작용하고 있다. 홍승하 최고위원은 “정파 문제 등 이해관계 중심으로 당을 운영했을 때 역동성이 생겨날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한 보좌관은 “위기를 헤쳐나갈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지도부에는 없다. 근본적인 쇄신보다 그냥 열심히 하자는 식”이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당에서는 5·31 이후에도 ‘서민들과 접근성 높이기’ 등 원론적 수준의 해결책만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2007년 대선까지는 1년 반, 2008년 총선까지는 2년이 남았을 뿐이다. 대선이 총선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1년 반 동안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이는 곧 민주노동당 이외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없는 정치 현실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양당 구조의 변화 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다. 국민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은 이내 쇠잔하는 역사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또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바로 옆의 열린우리당을 봐도 당의 혁신을 통한 내실 다지기가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 “이대로 가면 2008년 총선의 앞날은 어둡다”는 권영길 의원의 발언은 기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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