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거 배패 뒤 진보정당의 한계를 절감하는 울산 북구 민주노동당의 풍경
“명분에 근거한 정치가 아니라, 기성정당으로 현실정치를 펴야 한다”
▣ 울산=글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10월26일 오후 4시 울산 북구 민주노동당 시당사무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당원들 틈 속에 조승수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 보였다. 투표율을 점검하느라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그의 표정은 줄곧 굳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뒤면 그가 잃은 국회의원 자리의 새 주인이 가려진다. 사무실 벽면엔 ‘심판! 대법원 부당판결!’ ‘선택! 진보정당 지키기!’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칠판엔 누가 썼는지 ‘필승, 공짜 없다!’란 글귀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마음이 무겁다며 어렵게 입을 뗀 조 전 의원이지만, “결코 질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승부”라고 말할 땐 손에 힘이 실렸다.
높은 투표율에 건 기대는 물거품으로
시당사무실에서 차로 10분쯤 떨어진 정갑득 후보의 선거사무소도 정신이 없었다. “투표 양태는? 농산 2투(투표소)가 (투표율이) 왜 이리 낮아?” 송주석 선거대책본부 상황실장(울산시당 북구 사무처장)은 손동화 당원을 다그쳤다. 매 시간에 나오는 투표 진행 상황을 붙잡고 투표구마다 강세 지역은 빨간색, 약세 지역은 파란색 표시를 해가며 씨름하고 있었다. 노조 조합원들의 집단 거주지는 빨간색으로 표시됐다. 투표 시작~오전 9시, 오후 5시~저녁 8시 투표율이 높은 것은 민주노동당에 유리하다고 분석됐다. 2교대인 현대차 노동자들의 출퇴근 교대조들이 몰이투표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송주석 실장은 개표상황실이 마련된 시당사무실로 가는 길에 “이런 선거는 처음이다. 이길 것 같기도 질 것 같기도 하고, 박빙일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민심의 흐름을 못 잡겠다”고 답답해했다. 시당사무실은 울산 북구의 최종 투표율이 52.5%로 집계되자, 안도감으로 가득 찼다. 지지층의 몰표가 투표율을 끌어올렸다고 예상한 때문이다. 100명이 넘는 당원과 현대차 노동자들은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건넬 만큼 분위기는 승리 쪽으로 흘러갔다. 개표가 시작되면서 1위를 달리는 윤두환 한나라당 후보와 정갑득 후보의 표차가 벌어졌지만, 지난해 ‘4·15 총선’에서 조승수 의원이 연출한 역전극의 기억을 지우진 못하는 듯했다. 밤 10시25분, 정 후보가 400여 표를 앞서가자 환호성이 터졌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순식간에 역전된 표차는 다신 좁혀지지 않았다. 중앙당에서 내려온 김기주 기획조정실 부장은 컴퓨터 앞에 조용히 앉아 정갑득 후보의 ‘당선 사례’를 ‘낙선 사례’로 가다듬었다.
개표율이 96.8%에 이르자, 개표상황실 맨 앞에서 굳게 입을 다물며 자리를 지켜온 정 후보가 불쑥 일어섰다. “진 것 같다. 진보정치가 이렇게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시작하자!” 그렇게 민심을 잡지 못한 민주노동당은 졌다. 노동운동의 ‘메카’이자, 진보정치의 산실로 여겨온 울산 북구를 한나라당에 내준 것이다. 주대환 정책위원장은 뒤풀이 자리에서 “정말로 큰 시련”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예상과 달리’(?) 왜 졌을까? “민주노동당의 가슴엔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 사회적 약자가 있었으나 행동으로 외화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서민들의 이해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으나, 우리의 방식은 미숙하고 협소해 우리 자신의 폭을 좁힌 결과를 낳았습니다. 노동계 비리 등으로 진보 진영의 도덕성이 훼손됐을 때에도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선거 바로 다음날 당 최고위원회의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 속엔 패배의 원인이 함축돼 있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실장은 “민주노동당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 선거를 진단했다.
‘중간표’ 흡수는 지역에서 해내야
민주노동당은 9월29일 조승수 의원이 의원직을 잃은 뒤 10월10일 갑작스럽게 경선을 치러야 했다. 불과 이틀 뒤인 12일 후보 등록을 마치고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경선 후유증도 채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조직 정비도 늦었다. 후보가 인사를 돌지 못한 곳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년 전부터 밑바닥 민심을 훑은 윤두환 후보와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통일 내전’ 논란이 울산 북구 토박이를 중심으로 한 보수층의 결집을 가져왔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인물론으로 후보 개인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상쇄해줄 만큼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의 ‘프리미엄’이 대단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표피적’인 패인 뒤엔 최고위원회가 “당의 한계를 심판받았다”고 할 만큼 본질적인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조승수 동정론’을 엎고 진보 정치와 의원 법안 발의석 10석의 사수를 외치는 선거 구호가 결국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한계는 대중성과 계급성, 도덕성의 문제로 압축할 수 있다.
“당분간 ‘지역 속으로’가 화두가 될 것 같다.” 민주노동당 울산시 울주군 당원 민두홍씨는 씁쓸한 막걸리를 들이켰다. 사실 대중성은 ‘민심 속으로’로 상징될 만큼 지역성, 현장성과 결부돼 있다. 민주노동당은 비조합원, 주부, 농민, 노인층 등 ‘지역표’를 흡수하지 못했다. 김배곤 당 부대변인은 “기본적으로 나올 표는 다 나왔다. 나머지는 ‘중간표’들인데, 이건 지역에서 해내야 한다. 만날 기본표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역발전의 논리를 들고 나온 윤두환 후보에 맞서 민주노동당의 정치 구호와 반론만이 부각됐을 뿐이다. 지역민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구체적인 이슈를 발굴해내지 못했다. 문병학 정책위 제1정조실장은 “앞으로 명분에 근거한 가능성의 정치가 아니라, 기성정당으로서 실물에 기초한 현실정치를 펴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울산 북구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이냐’란 질문에 민주노동당은 취약했다. 이는 후보자 개인이나 울산 북구만의 문제가 아닌 민주노동당이 막닥뜨린 본질적인 문제라는 게 당원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염정배 울산시당 남구지역위원회 조직부장은 “남구도 당장 10일 뒤 선거를 치른다면 안 된다. 당원들의 준비가 안 된 게 현실”이라고 했다. 류인목 시의원도 “가장 큰 것은 이 지역에 지역사업이 활성화되지 않은 현장 활동의 한계였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기존 정당과 차별되는 정치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받기는 더 이상 어렵다는 것을 이번 선거가 확인시켜줬다. 국민들의 요구가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염정배 조직부장은 “시민들의 당에 대한 욕심이 많아졌다. 이제 생활에서부터 민원 등을 차근차근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10%대의 정당 지지율을 보내면서도 ‘민주노동당이 체제 비판적인 시민운동 단체의 성격이 강하다’(62.9%·KSOI 10월11일 조사)는 인식을 갖는 것은 국민들의 기대치와 민주노동당의 현실 역량의 괴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임종락 울산시당 남구지역위원회 부위원장이 “말은 맞는데 과연 대안인가에 시민들을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의제가 현실 정책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국민들의 커다란 회의가 존재한다. 이는 기존 정당이나 정치세력과는 다른 ‘대안 정치세력’으로서 평가받는 민주노동당에게 존재의 이유와 명분을 점점 갉아먹는 위기의 신호들이다. 경기 성남, 경남 창원, 울산 동구 등이 그나마 모범적으로 지역사업을 해내고 있는 곳으로 평가받지만, 당이 지역 발전에 대한 방향을 아직 잡지 못했다는 게 중앙과 현장의 공통된 그리고 냉정한 진단이다.
공장 유치나 규제 완화 등 개발론을 들고 나오는 기성 정당과 다른 접근법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코리아리서치의 10월18일 조사에서, 울산 북구 주민들은 가장 시급하게 갖춰야 할 기본시설(인프라)로 문화시설(26.3%) → 교육시설(25.1%) → 도로·교통시설(16.6%) → 생활편의 시설(16.2%) 순으로 꼽았다. 민주노동당이 지역 발전을 내세우며 비집고 들어갈 틈새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역사업을 풀어가는 행정의 방식 또한 중요하다. 농소동의 음식물자원화시설의 설치는 환경적 가치를 내세우는 당의 정강 정책과 집값 등 주거환경을 우선시하는 주민들과 충돌하게 만들었다. 민주노동당 소속의 울산북구청장이 밀어붙였다고 판단한 주민들은 전통적 지지층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한 당직자는 “기존 정당보다 더 많이 주민과 토론하고 대화해야 하는데, 주민들이 공감하는 수준까지 가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역 발전에 대한 방향을 잡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선거에서 나름대로 현대차 조합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선거 기간 동안 울산 북구에 지원을 나온 한 중앙당직자는 “지역정치와 생활정치의 이반 현상이 있었던 반면에 현대차의 핵심 지지기반은 민주노총의 위기의식 때문에 더 결집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만큼이 되레 한계였다. 염정배 조직부장은 “냉정하게 민주노총이 도와주지 않으면 힘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것만 보고선 할 수 없다.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로 ‘노조에 치우친 활동’(26.8%·표2 참조)을 꼽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서서 ‘최대 후원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잇따라 터져나온 민주노총 지도부의 비리 문제는 곧바로 진보 진영의 정치적 대변자인 민주노동당의 도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방석수 기획조정실장은 “노조와 당의 관계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문제도 골칫거리다. 한 당직자는 “비정규직 문제를 풀었으면 이렇게 어렵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송주석 사무처장은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과 원청·하청 노동자 간 갈등 등 우리 내부의 모든 문제가 이번에 드러났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하지 않으면 당의 미래가 없다”며 사회적 약자 계급을 통합해내는 일이 당의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노조와 당의 관계도 고민할 시점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의석 수가 하나 줄어 제4당으로 추락한 당이 앞으로 군소정당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감도 크다. 송주석 사무처장은 “반드시 지켜야 할 곳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패배 책임론이 난무할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선거가 반드시 교훈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싼 수업료를 내고 얻는 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지난해 4·15 총선 이후 전국 단위의 심판을 받아볼 수 있는 지방선거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엔 기회이자 위기일 수 있다. ‘10·26 재선’에서 얻은 실패의 교훈과 그에 따른 방향 설정은 그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이용진 선거대책본부장(울산시당 북구 위원장)은 “유권자가 회초리를 든 까닭은 민주노동당의 혁신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라며 절망에 찬 개표상황실의 분위기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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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다음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손상흥(37) 민주노동당 당원은 찬 기운의 새벽 공기를 뚫고 연방 출근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허리를 숙였다. 울산 북구 농소3동에서 선거운동 기간 내내 오전 6시30분~8시20분 자발적으로 유세 도우미를 해왔던 그는 10월27일에도 혼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날 늦게까지 개표 상황을 보며 시당사무실을 지켰던 그는 “주민들에게 민주노동당 지지를 감사드리고, 다시 꿋꿋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도 이날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체의 노동자다.
손씨는 이번 10·26 재선의 결과를 “더 열심히 해라, 반성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나름대로 국민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겼다. 그는 “일상적으로 밑바닥 뿌리에서부터 정치활동을 해왔어야 하는데, 선거 때만 ‘지역 속으로’를 외쳤다. 민주노동당의 전반이 지역의 대중 속으로 쉽게 들어가지 않은 채 대기업의 노동자 중심으로 활동해왔다”며 당 활동의 혁신을 주문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다시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내년 지방선거는 잘 준비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그는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내년 5월엔 더 좋은 소식을 드리겠다”고 큰 소리로 약속했다. 손씨는 당선자도 패배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길과 3천여 명의 유권자들이 사는 마을 아파트단지를 잇는 중간 다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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