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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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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련의 DJ 박스여!

등록 2005-08-31 00:00 수정 2020-05-03 04:24

“97년 대선자금 조사 바람직 않다”는 발언은 ‘DJ 보호’의도로 이해되기 충분
밑천인 개혁성·도덕성마저 의심받으며 ‘재벌 보호자’라는 낙인까지 찍힐 판

▣ 신승근 기자 whanita@freechal.com

‘X파일’과 ‘노무현의 DJ 딜레마’는 끝내 노무현 대통령을 허물고 말 것인가. 과거 안기부 미림팀이 생산한 불법 도청 테이프의 존재가 밝혀진 ‘X파일 파문’이 갈수록 노무현 대통령을 옥죄는 악재로 작동하자 여권 안팎에서 이런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시민사회단체의 기대에 폭탄을 던지다

노 대통령은 지난 8월5일 국가정보원의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권 시절 불법 도·감청 지속 발표 직후 ‘DJ 청산 음모론’이 제기되자 “정부가 성의를 다해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진정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동교동의 분노 표출, DJ 입원으로 노 대통령과 DJ의 갈등 국면으로 비화하자, 당황한 청와대와 여권은 “불법 도청의 추악한 진실을 밝히려는 노 대통령이 파문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보수 언론의 은근한 저항과 본질 호도, 삼성의 ‘떡값’을 삼킨 검찰의 저항, 정치권의 이해타산 때문에 X파일의 진실이 묻힐지 모른다고 우려하던 시민사회단체는 여권의 이런 호소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난 8월24일 노 대통령은 시민사회단체의 기대와 요구를 짓밟는 ‘폭탄’을 던졌다. “97년 대선 후보 조사는 바람직하지 않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자신과 이회창 후보의 대선자금 수사로 (대선자금의) 구조적 문제가 밝혀졌고 △97년 (대선자금) 문제는 이미 시효가 지났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여기에 세풍사건으로 97년 대선자금, 2002년 대선자금까지 조사받은 이회창 후보에게 너무 야박하다는 이른바 ‘패장 예우론’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논리는 스스로 주창한 진실 규명 의지에 의문을 초래할 뿐 아니라, 임기 2년6개월 동안 최고의 성과로 내세워온 검찰 독립과 탈권위 행보의 공적까지 뒤엎는 자충수로 작용하고 있다. 상당수 법학자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검찰 독립성을 훼손하고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X파일에 담긴 권력-언론-재벌의 ‘검은 3각 커넥션’ 규명을 외쳐온 시민단체도 검찰에 대한 수사 중단 지시라며 반발한다.

여권 관계자들조차 “임기 절반을 넘긴 시점의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악인 상황에서 그나마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의 개혁성과 탈권위 행보조차 의심받을까봐 걱정”이라며 “노 대통령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정말 답답하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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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왜 책임정치가 어렵다는 29%의 낮은 지지율 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밑천까지 탕진하는 폭탄을 터뜨린 것일까. 노 대통령은 25일 한국방송에 출연해 “소위 대선자금 부분에 관해서는 정치적 마무리를 내 딴에는 짓는다고 지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주관적 판단과 열망처럼 97년 대선자금 문제는 좀체 정치적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노 대통령의 발언으로 다시 한번 ‘DJ를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동정받는 패장이 된 이회창 전 후보쪽이 먼저 “현 정권과 전임 정권에서 세풍, 안풍 등 깡그리 다 뒤져서 수사했고, 이제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불법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질 것 같으니까 서둘러 덮으려는 것”이라고 공박했다. 본질은 DJ 보호라는 것이다. 삼성의 ‘떡값’을 받아먹은 검찰 간부의 실명을 공개했던 노회찬 의원(민주노동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삼성에서 돈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며 DJ와 삼성의 검은돈 거래 의혹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그는 “기아차 인수와 관련해 대가성이 있는 뇌물인지, 순수 정치자금인지 따져봐야 하며, 정치자금이라 해도 대통령 재임 중 시효가 정지되므로 공소시효는 끝나지 않았다”며 노 대통령의 시효소멸론도 반박했다.

이회창은 이미 각종 조사에서 망신창이

청와대와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DJ 보호를 위한 검찰 수사 중단 요구’라는 의혹을 부인한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은 25일 기독교방송 뉴스 프로그램에 출현해 “지난 대선자금 조사 때 노 대통령이 울먹이면서 얘기할 정도로 정말 아프게 조사를 받았다”면서 “검찰이 절치부심하고 있지, 대통령의 말을 (수사 중단)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친노 직계인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이 다시 대선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이런 발언으로 호남에서 무슨 점수를 따겠다고 DJ 보호를 위해 수사 중단을 지시하겠냐”면서 “97년 대선자금, 2002년 대선자금 문제로 이미 몇 차례 온 나라가 뒤흔들렸으니, 이제 그런 것을 갖고 정치공학적 대결 놀음은 그만하자는 호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당수 여권 의원들은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DJ의 정치적 자산에 기대어 집권한 노 대통령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인정한다. 노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한 여권 인사는 “X파일을 계기로 97년 대선자금을 건드릴 경우 이회창 후보 것뿐 아니라 DJ 것도 봐야 하는데, 창은 이미 각종 조사에서 만신창이가 됐다”면서 “결국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인 DJ의 대선자금으로 초점이 맞춰지는 게 순리고, 대통령도 그런 부담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수도권 의원도 “집권 기반이 취약한 노 대통령이 아직도 호남의 지지를 받는 DJ를 의식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의 속내와 정치적 노림수가 무엇이든, 한달째 이어지는 X파일 국면에서 노 대통령은 두 번째 ‘DJ 딜레마’에 부닥치는 불운한 처지가 됐다. 이번에는 밑천인 개혁성과 도덕성을 뿌리부터 의심받는 상황이라 ‘DJ 차별 음모론’ 때보다 더 위험하다. 더욱이 X파일 수사가 권력과 검찰에 ‘돈질’을 한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쪽으로 결론날 경우 노 대통령은 재벌 보호자란 비판까지 떠안아야 한다. 그동안 삼성의 ‘2만달러 시대론’ 국정지표 차용 등으로 삼성과의 돈독한 관계를 의심받아온 노 대통령에 X파일은 ‘시련의 상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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